▲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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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욕구가 증대하던 시기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전통적인 왕조체제가 약해지면서 자본가 계급이 세계 주요 지역에서 권력을 차지했고, 이들과 동전의 양면 관계인 노동자 계급 역시 권리를 갖기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러면서 대중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1919년 3·1운동의 표면적 구호는 '대한독립 만세'와 '일본 나가라'였다. 하지만 실질적 구호는 동학혁명과 독립협회 등을 거치며 구체화된 민주공화제 실현이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그해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규정을 넣었다. 이는 이들이 확인한 3·1 민심이 민주공화였기 때문이다.
그해 7월 31일 독일 바이마르에서는 바이마르헌법으로 불리게 될 독일 헌법이 국민의회에서 채택됐다. 이 헌법 제22조 제1항은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규정했고, 제20조는 국민이 의회를 선출하게 하고 제41조 제1항은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했다.
독일은 제1차 대전 당시 일본의 적대국이었다. 패전한 독일에서만 민주주의가 진전된 게 아니라, 일본 지배하인 식민지 한국에서도 민주공화제 욕구가 분출됐다. 적대국에서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일본에 유리할 수 있어도 식민지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불리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일본은 민주주의 요구를 교묘히 처리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민주공화 요구를 무작정 배척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참정권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참정권을 주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그런 시늉을 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 친일파들이 있었다. 국민협회를 만들어 참정권 운동을 벌인 민원식이 대표적이다. 민원식은 식민지 한국도 일본제국의 지역구로 만들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방식으로 3·1운동의 열기를 잠재우려 한 것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상당히 고단수 친일파였다. 3·1운동 직후부터 그가 벌인 인상적인 활동들을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역사학자 조재곤의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무렵 민원식은 일본 국회에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한다. 신일본주의에서 출발한 참정권 청원운동은 일본 국회에 조선인 지역대표를 보내자는 것으로, 일본 당국의 주선으로 민원식은 제42의회(1920.1), 제43의회(1920.7), 제44의회(1921.2) 등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중의원에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한다."
민원식이 표방한 신일본주의는 '일본민족뿐 아니라 한민족도 함께하는 새로운 일본이 등장했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2006년에 <사총> 제62권에 수록된 송규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의 논문 '일제하 참정권 청원운동의 논리'는 고양군수 민원식이 1919년 10월에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일을 언급하면서 "신일본주의는 일본과 조선 민족공동의 국가인 새로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민원식의 외침이 어떻게 비쳐졌는지는 역사학자 신채호가 김원봉의 의열단에 써준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에 나타난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라고 한 뒤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라고 질타했다.
친일 노선에 결정적 영향 준 유년기의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