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백화점은 강남점 1층 더 스테이지에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기업 '하이브'와 손잡고 '아티스트-메이드 컬렉션 바이 세븐틴(Artist-Made Collection by SEVENTEEN)' 시즌2를 지난 25일까지 2주간 선보였다. 사진은 세븐틴 팝업스토어 시즌2 현장 모습. 2024.3.12 [신세계백화점 제공]
연합뉴스
수년 전부터 공간정체성은 중요한 트렌드로 떠올랐다.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인정되고 과거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등장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이들에게 공간은 사진과 영상으로 직접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매개다. 복잡한 설명 없이 개성과 차별성을 시각적,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 공간정체성은 중요하다. 소비자는 정체성이 투영된 공간에서 가성비의 벽을 무너뜨린다. 가치소비가 이루어지면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 팝업 스토어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음반이나 캐릭터를 구매하거나 취향이 맞는 카페에서 한 잔에 만 원짜리 커피를 소비하는 건, 과소비가 아니라 가치소비다.
공간(place)의 제약도 사라진다. 예전에 매장 위치 중 1급지는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변이었다. 당연히 임대료와 관리비가 비싸고 큰 투자 위험이 수반됐다. 그러나 공간정체성이 뚜렷하면 골목길 2층이나 한적한 시외 길가에 매장을 오픈해도 운영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보고 가고 싶은 곳을 어떻게든 찾아간다. 게다가 그 과정을 탐험과 모험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자연스레 그 속에서 작은 브랜드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자금이 부족하지만 뚜렷한 개성과 아이디어를 상품화할 수 있다면 공간(place)적 제약은 사라진다. 신당동의 작은 매장과 식당들이 생존하고 있는 이유다. 런던에 없는 인테리어를 가진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 오픈런의 성지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들의 트렌드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소셜 미디어에 익숙하다면 나이와 세대라는 가림막은 사라진다. 작은 브랜드가 살아남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공간정체성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여행 트렌드도 변했다. 예전 여행을 계획할 때는 랜드 마크나 관광지를 정하고 숙소를 정했지만 요즘에는 먼저 숙소를 정하고 주위를 탐험하듯 여행한다. 어떤 숙소에서 머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호텔에 머물며 힐링하는 호캉스도 테마에 따라 다양해지고 있다. 고객은 자신의 감성과 취향으로 꾸민 호텔 룸에 기꺼이 거금을 투자한다.
레트로(Retro) vs 레프로(Repro)
레트로는 복고적인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감성을 제품이나 공간에 표현하고 드러낸 것이다. 제임스 길모어(버지니아 대학교 비즈니스 스쿨 교수)와 조지프 파인 2세(컬럼비아 대학교 기술경영학 교수)는 <진정성의 힘>에서 레트로 제품을 과거의 디자인을 소환한, 독창적인 제품이라고 설명한다. 옛날 감성을 입힌 것뿐이다. 충분히 더 독창적일 수 있다. 빈티지 옷은 실제 입어서 낡은 것이 아니라, 낡게 보이는 새 옷인 것이다.
비근한 예로 곰표 밀맥주가 있다. 곰표라는 빈티지 브랜드를 끌어와 맥주에 붙였다. 동대문 경동 시장에 오픈한 스타벅스 경성1960은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매장이다. 오래돼 보이는 인테리어는 모두 꾸민 것이다. 경성에는 이런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표현했다.
요즘에는 삼겹살과 대창집 프랜차이즈가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럴듯한, 존재했을 것 같은 인테리어로 마치 70~80년대 원통 테이블에서 냉동 삼겹살을 굽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레트로는 과거 감성을 어필하고 고객들은 판타지를 소비한다.
반면 레프로는 재현된 것(reproduction)을 의미한다. 외관은 오리지널과 똑같지만 알맹이는 완전 다르다. 콘텐츠가 다를 수도 있고 인테리어 또는 메커니즘이 다를 수도 있다. 구형 자동차의 외관은 그대로 두되, 엔진을 최신형으로 바꾼다든지, 시계 껍데기는 원형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한다든지, 라면이나 과자 봉지를 오리지널로 복원하는 예가 레프로다.
앞서 소개한 신당동의 작은 가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쌀집, 양곡 창고, 슈퍼의 외형을 그대로 사용하되 내부는 카페, 치킨 집, 국수 가게로 바꾼 경우다. 레프로 매장에서는 오리지널에 대한 진정성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수십 년 존재했던 감성과 힘을 배경으로 현대적 콘텐츠를 즐긴다.
레트로와 레프로는 공간정체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수단 혹은 방향성이다. 고객들이 자기 정체성과 공간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과정 중심에는 진정성(authenticity)이 있다. 아무리 멋진 인테리어와 감성으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으면 소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성 그리고 크래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