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히너, <에리히 헤켈과 대화하며 누워있는 프랜지>, 1910년, 종이에 목탄, 스위스 키르히너 미술관
키르히너
결국 경찰이 작업실에 들이닥쳤다. 다리파 화가들이 그린 작품이 전시됐을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소녀들이 유인되어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작업실엔 프랜지를 비롯한 소녀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
화가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이들을 폭행하거나 강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녀들의 반응도 의외였다. 그들은 오히려 이곳에서의 생활을 더 원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의 원가정은 그리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떨어진 채 작업실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말이다.
프랜지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집안의 열두 아이 중 막내딸이었던 프랜지는 가정에서 방임됐을 확률이 높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프랜지는 어머니의 생업이었던 모자 만드는 가게에서 '도도'라는 키르히너의 애인이자 모델을 우연히 만났고, 도도의 이끌림에 따라 다리파의 작업실로 흘러오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아마도 키르히너는 프랜지가 기댈 곳 없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만약 프랜지가 중산층의 딸이었다면, 과연 키르히너는 '탈문명과 해방'이라는 대의를 자신 있게 내걸며 아이의 옷을 당당하게 벗길 수 있었을까?
다리파는 반 부르주아를 예술의 비전으로 삼고 있었지만, 정작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은 부르주아 남성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그것도 부르주아 사회 속 대표적 피해자였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소녀에게 말이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캐롤 던컨은 논문 <20세기 초 전위회화에 나타난 남성다움과 지배>에서 키르히너 등 다리파의 급진적인 주장은 모순이라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들의 그림에 의하면 미술가의 해방이란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자유는 타인의 비자유를 요구한다.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항하기는커녕, 이 그림들이 내포하는 남녀관계는 여성을 특정한 남성의 흥밋거리로 철저하게 격하시키며, 성차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계급 관계로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던컨에 따르면 키르히너는 자신의 '해방'을 위해, 결과적으로 프랜지의 나이, 가난,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점을 이용한 셈이다.
너와 나의 해방은 연결돼 있다
미국의 작가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비장애 중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서로 협력하고 있는데, 이를 보지 않고 한 가지 억압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없는 환경운동은 임시 처방이 되어버리고,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 없이 동성결혼을 통해 주류에 편입되는 것을 퀴어 해방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심지어 키르히너가 그랬듯, 다른 억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프랜지는 자신의 성이 '해방의 예술'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어린 시절이 뼈아프게 다가왔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아버지 브론슨 올콧은 초월주의자로서는 훌륭했다. 그는 다른 이에게 관습의 속박이나 제약에 불복종해야 한다고 치열하게 설득하던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의 대의를 위해 가족을 수족처럼 부렸던 영락 없는 가부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여성들을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가부장제를 재생산한 장본인이 되었다. 브론슨은 알아야 했다. 자신이 그토록 깨부수고 싶어하는 체제의 일부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너와 나의 해방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 체제의 부역자가 된다는 그 쓰디쓴 진실을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