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97년 10월 15일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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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거를 좌지우지하기 힘든 지금의 미국이 볼 때, 꿈만 같았던 일들이 과거에는 많았다. 한국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지금보다 훨씬 용이하게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1993년에 발생한 제1차 북핵위기를 1994년에 제네바합의로 봉합한 미국은 그 뒤 북한과 미사일 협상 및 미군유해 송환협상을 벌였다. 1996년 4월 20일 자 <동아일보> 5면 우단에 보도된 것처럼 빌 클린턴 행정부는 비밀리에 수교 협상도 진행했다.
그랬던 미국이 1996년 4·11총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갑자기 대북 긴장을 고조시켰다. 위 신문의 그달 10일 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면 19일로 예정된 미사일 협상을 중지하거나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9일자 <교도통신>을 통해 내보냈다. 미국이 북한의 도발을 운운함과 동시에 미국이 북미 협상을 연기하는 모습은 보수냉전세력인 신한국당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앞서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미국은 총선 전까지 북미대화를 자제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수용했으나 한국 총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북미대화의 물꼬를 토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미국이 여당의 선거를 위해 북미 간의 긴장 모드를 일시적으로 조성해 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95년 10월 1일 자 <경향신문> 1면 우하단에 보도됐듯, 4·11총선 7개월 전인 1995년 9월 29일(워싱턴 시각)에 미국은 '평양 외교단지에 미국 연락사무소를 입주시킨다'는 합의를 북한과 체결했다. 그해 12월 6일에 신한국당으로 개칭될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미국은 북한과의 이 합의도 연기했다.
1997년 10월 13일 자 <워싱턴 포스트>에 근거한 이틀 뒤의 <동아일보> 2면 좌하단 기사에 따르면, 북·미가 연락사무소 개설에 합의한 직후인 1995년 10월에 김영삼 정부는 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을 통해 미국에 부탁을 했다. '매우 어려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미국이 총선 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면 민자당이 보수세력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취지였다.
연락사무소 개설을 연기해 달하는 이 요청에 대해 토마스 허바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연락사무소를 개설할 때는 한국의 국내 정치적 여건을 감안하겠다"는 비밀 약속을 해줬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약화시키겠다는 이 약속은 연락사무소 설치를 아예 무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부 때의 두 사례는 1990년을 전후한 세계적 탈냉전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던 시절에 일어난 일들이다. 미국의 입김이 훨씬 강했던 냉전시대에는 미국의 총선 개입이 한국의 운명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1948년 3월 3일 자 <동아일보> 1면 상단에 따르면, 존 하지 군정사령관은 제1대 총선을 5월 9일에 실시한다는 특별성명을 3월 1일에 발표했다. '5월 10일 선거' 계획은 5월 9일이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5월 10일 선거'로 바뀌었다.
선거일이 이처럼 5월로 정해진 상태에서 미군정은 3월 22일의 군정법령 제173호를 통해 제한적인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유상 몰수, 유상 분배'에 기초해 일본인 농지를 불하하는 이 조치는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주장해온 좌파 정치세력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이 조치를 기반으로 이승만 정권은 그해 8월 15일의 정부수립 이후에 농지개혁을 추가로 진행했다. 보수세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이런 농지개혁은 한국 좌파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 한국 선거에 대한 미국의 개입 중에서 이처럼 강력하고 지속적인 효과를 낳은 사례는 드물다.
오늘날의 미국은 1948년 총선은 물론이고 1996년 총선 때의 개입도 관철시키기 힘들다. 한미 양국의 역학관계가 그만큼 달라져 있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은 선거 개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한미일 삼각 협력에 묶어두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윤석열 정권이 힘을 잃는다 해도 한국을 한미일 안보협력 안에서 단단히 묶어놓을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남의 의사를 조작하는 것 못지않게 나쁜 것은 남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남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한미일 협력을 제도화하겠다는 움직임은 한국인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한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겠다는 주권 침해적 발상의 표현이다.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이 같은 태도에 경종을 올리는 길은 한국 선거와 관계없는 한미일 안보협력의 제도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국에 표시하는 것이다. 한국의 운명은 일차적으로 한국인들의 의사표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이번 총선 과정을 통해 미국에 명확히 표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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