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 카드에 적힌 이제국의 인적 사항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제국의 창씨명은 국본창근(國本蒼根)과 국본낙국(國本洛國)이다. 항일운동으로 수감된 곳은 서대문형무소다. 신상카드에 따르면, 키가 154cm이고 지문 번호가 97777과 99969인 그의 죄명은 보안법 위반죄다. 육군형법 위반죄도 함께 적혀 있다.
그에게는 항일운동의 결과물인 보안법 및 육군형법 위반죄 외에도 전과가 더 있었다. 신상카드 중간의 '기타 전과'란에 '3범'으로 표기돼 있다.
1941년 5월 16일자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그에게는 절도죄 전과 2범과 공무집행방해죄 1범이 있었다. 절도 전과자가 항일운동가로 변신했으니,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혼란기가 아니었다면 뉴스의 초점이 됐을 만한 인물이다.
이제국은 보통학교 5학년이자 15세 때인 1931년 3월 생계 곤란을 이유로 학교를 중퇴했다. 학비 부족도 아니고 생계 곤란이 사유가 됐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3년 8월 22일, 17세 나이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절도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7년 2월 23일에는 같은 법원에서 주거침입철도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 형량을 치른 직후인 1939년 3월 16일에는 같은 법원에서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절도죄 등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세 차례나 유죄를 받은 청년이 마지막에는 항일운동가가 되어 경성지방법원 피고석에 앉았다. '이제국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보다 '이제국이 왜?' 하며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절도 전과 2범이 된 그가 공무집행방해죄까지 추가해 전과 3범이 된 1939년의 일이다. 스물네 살의 이제국을 감동시키는 일이 감옥에서 일어난다. 훗날 마포형무소로 불리게 될 경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그는 우연히 항일투사 오동진(吳東振)을 만나게 된다.
이제국이 만난 오동진이 1920년에 광복군총영을 결성해 항일전투를 수행한 송암 오동진(1889~1944)이라고 확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송암 오동진이 1927년에 붙들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44년에 순국한 점, 경성감옥에도 수감된 일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국을 감동시킨 항일투사가 27세 연상의 송암 오동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오동진은 아주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제국에게 충고했다. "조선 청년으로 하여 절도죄와 같은 파렴치한 죄로 처형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 독립운동과 같은 범죄를 하여 처형됨을 숙원으로 해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이제국은 오동진이 주문한 것보다 훨씬 큰 꿈을 품었다. "조선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과 동시에 스스로는 뛰어난 사상가로서 세인의 신망을 넓힌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이 대목에서 일제 판사는 그의 꿈을 "야망"으로 표현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뛰어난 사상가로서 세인의 신망을 넓힌다"는 꿈을 꾼 것이 일제 판사에게는 '희망'이 아닌 '야망'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이제국을 외면한 대한민국 정부... 공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