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그는 어린시절 일기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했다.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분신한 지 몇 분 만에 숨기 끊기다니
헌병대장은 가족의 의구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 장병 앞에서 연설하듯 설명을 이어갔다. "최 이병이 몸에 불을 붙인 시간이 9월 8일 00:50분, 쓰레기 소각장에서 멀지 않은 정문 위병소에서 초병 둘이 이를 알아채고 뛰어갔다. 한 명은 철모에 주변 흙탕물을 담아 끼얹고 또 한 명은 야전잠바로 내리치며 불을 껐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위생병이 경동맥을 짚었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덕정병원에서 내린 의사의 진단도 마찬가지였다"라는 것이었다.
헌병대장의 말을 들을수록 최봉규의 의혹은 깊어졌다. 휘발유 900ml를 몸에 끼얹었다? 휘발유는 어떻게 구했으며 그 정도면 막걸리 한 통보다 조금 많은 양이어서 겨우 머리나 어깨 정도만 적셨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본 아들은 다리까지, 온몸이 탄 모습이었다. 불은 분명 위로 치솟았을 터인데. 또 피부의 색깔이 다소 붉었으나 살갗이 오그라들지도 비틀리지도 않았다. 물집도 없었다. 이들 말처럼 3도 화상이면 피부 신경이 망가지고 살갗이 검게 변할 정도인데 우혁이 몸은 약간 그을렸다는 느낌 정도였다.
헌병대장은 설명을 마치고 7327부대장의 방으로 최봉규와 가족을 안내했다. 연병장 가득 파리한 햇빛이 쏟아졌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자신들도 흐느끼면서 무너져 내리는 엄마를 부축했다. 7327부대장인 권 대령은 위로의 인사를 하더니 "사망 몇 시간 전 최 이병은 우측 손목을 사무용 칼로 자해했습니다. 아마도 이 방법으로 안 되니 2차 수단으로 분신을 택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분신 앞뒤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했다는 인상을 주려 애쓰는 분위기였다. 권 대령이 말을 마치자 헌병대장은 부검을 해 정확한 사인을 가리자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유품을 건네겠다며 헌병대 파견대 사무실로 다시 최봉규를 이끌었다.
사병들이 가져온 유품은 뒤죽박죽이었다. 우혁이 시계는 마지막 면회 때 누나가 사다 준 전자식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기계식을 두 개나 가져왔다. 군번줄도 우혁이 것이 아닌 다른 사병의 것을 가져왔다. 물건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허둥거리는 모습이었다. 두 개의 훈련 수첩은 막내의 글씨가 담긴 걸 보아 제대로 가져온 것 같은데 한 개의 수첩은 거의 뜯겨 있어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헌병대장은 유품을 건넨 후 최초 목격자인 정문 초병인 김 상병을 불렀다. 그는 김 상병에게 "(최 이병이) 장승처럼 서서 타고 있더란 말이지"라고 물었고 김 상병은 "네"라고 대답했다. "흙탕물을 끼얹어서 끄고 그 다음은 어떻게 했나" 이어지는 헌병대장의 질문에 그는 "뭐 해, 굴러라 굴러! 하니까 좌로 한번 우로 한번 굴렀습니다"라고 답했다.
최봉규는 이 문답을 보면서 의구심이 더 커졌다. 사람이 어찌 불 속에서 발버둥치지 않고 '장승처럼 꼿꼿이' 탈 수 있단 말인가? 몸이 타들어가다 고참이 말하니까 그때야 생각난 듯 좌로, 우로 한번 굴렀다는 설명은 그야말로 황당했다. 잠시 전 현장을 봤을 때도 흙탕물이 고여있던 흔적은 없었다. 김 상병은 헌병대장이 유도하는 듯한 물음에 짧게 대답하곤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또 다른 목격자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유서가 없고, 짧은 시간에 숨진 점 등 여러 의문점을 생각하면 자살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도 헌병대장은 초병과 문답을 마치자 재우쳐 부검에 대한 확답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상황을 매듭지으려고 서두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부검
최봉규는 두 아들에게 우혁이의 빈소를 지키게 하고 이날 밤늦게 집으로 올라갔다. 친척과 우혁이 학교에 연락을 취할 작정이었다. 9월 9일 새벽부터 최봉규는 전화를 돌렸다. 서양사학과 학과장실, 집에 남아 있는 우혁이 친구의 연락처 여기저기로. 최봉규가 부대에서 보낸 차로 덕정병원에 왔을 땐 정오 무렵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자 헌병대장은 부검을 위해 집도의가 대기하고 있다며 무더운 날씨에 시신이 상할 수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압박을 해왔다.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재야인사 계훈제 선생, 경원대학에서 분신한 송광영의 어머니, 그 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찾아왔다. 오후 2시가 넘어서면서 우혁이의 학교 친구들까지 모여들었다. 계훈제 선생은 "변호사가 입회하지 않으면 절대 부검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혁이의 친구들은 "우혁이가 자살했을 리 없습니다. 그동안 보안사의 녹화 공작으로 죽은 사례가 많습니다"라며 부검을 늦추라고 했다.
헌병대장과 7327부대장은 이런 상황 변화에 놀라 병원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냉동실이 없어 시신이 썩을 수 있고, 집도의는 지금 아니면 다음 일정을 잡을 수 없다"라며 최봉규에게 더욱 부검을 재촉했다. 최봉규는 어쩔 수 없이 부검을 받아들였다.
- 2편 <'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https://omn.kr/27l52)에서 계속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