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길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부족해진다. 그러니까 뭐든 해보고 또 해보자.
김미래/달리
불쑥 아내가 아침마다 일어나기가 힘들다며 최근 부쩍 너무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탄식했다. 나를 대신해 가장 역할까지 떠맡은 아내라 미안한 마음에 은근슬쩍 다른 얘기로 넘기려는데 선배마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기분이 좋아서 온 자리였는데 분위기가 처지는 듯싶어 시 하나를 꺼내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얼마 전에 외운 시인데 한 번 들어 볼래? 제목은 '나이' 김재진 시인의 시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던 슬픔을 순서대로 만나는 것이다
세월은 말을 타고 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침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곧이어 이 시를 외우면서 느낀 감정을 덧붙이려는데 아내가 갑자기 손뼉까지 치며 크게 소리쳤다.
"거봐. 너무 슬퍼. 아, 진짜 우울하다."
당황스러웠다. 분위기를 바꿔보려 외운 시가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말았다.
"아니, 아니 내 뜻은, 아니 이 시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지 말자 이거지. 나이 드는 건 인정해야 할 현실에 불과한 거고 나이가 들면 이럴 수 있으니까 미리미리 시간을 잘 써보자 이거지."
아내도 선배도 내 말에 수긍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분위기는 철학 토크 콘서트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는 사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나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 아닌가? 가는 세월을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오래 사는 나무라도 천 년 만 년 살 수 없으니까. 그런데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이 든다는 것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는 하루라도 빨리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한 살 한 살 더해지는 나이가 이토록 거북하기만 할까? 스무 살 때도 그랬나? 아니 서른, 마흔… 나는 아마도 쉰 살을 넘어가면서 이랬던 거 같다.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기저기 찾아보니 나와 비슷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의사들 말로는, 우리 핏줄은 아무리 늦어도 스무 살 정도면 이미 나빠지기 시작하고, 그 나이 즈음해서 뇌세포도 하루 백 만개가 넘게 매일 매일 죽어간다고 한다. 그렇기에 현대의 의학과 과학이 없었다면, 우리의 자연 수명은 기껏해야 39살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쉰 살을 넘겼으니,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지고 깜빡깜빡 자꾸 뭔가를 자주 잊어버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그럼 쉰 살을 넘게 살았으면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왜 나이 앞에만 서면 우리는 이렇게 작아지는 것일까?
(절로 입이 튀어 나오고 미간이 좁혀진다. 이미 기대 수명은 여든을 넘겼고 곧 백 세 시대가 온다는데 39살의 생물학적 자연 수명이라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말 중에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란 표현이 있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에서 저자 어슐러 르 귄은 나이가 들면서 이 말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했다. 80년을 넘게 살아온 그녀에게 아무리 좋은 뜻에서라도 "오,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라고 말하는 건 교황에게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르 귄은 노년은 그 나이에까지 이르는 것, 그러니까 시간의 문제라는 걸 인정하자고 한다. 실제로 르 귄이 보기에 건강한 90대 노인은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지 않고 명료한 정신으로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르 귄은 늙는다는 것, 즉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긍정적 사고도 좋지만, 나이란 현실을 바로보자고 주장한다. 르 귄의 말처럼 나이는 그 나이가 안겨 준 현실에 딱 맞는 삶을 사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르 귄의 이 글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 귄이 문제 삼은 '늙음'이란 현실 문제에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는 다른, 하지만 어쩌면 노력과는 무관한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서 비슷한, 또 다른 현실을 절실히 인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내가 가진 '장애'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
나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내가 처한 장애라는 현실을 극복하도록 긍정의 힘을 강조했다. 맞는 말이었고, 적잖게 도움도 됐다. 그런데 그 역효과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무리 긍정의 힘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긍정의 힘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현실을 무시하진 말자는 것이다. 젊어 보이는 건 분명 좋은 것이다. 하지만 젊어 보이는 것이지 젊은 건 아니다. 르 귄의 말처럼 오히려 냉철하고 명료하게 자기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늙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장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냥 좋아 보이는 것뿐이다. 그건 장애가 없어졌단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힘들더라도 냉철하고 명료하게 내 장애를 파악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한때는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늘어간 적도 있었지만 시간은 흘러갔다. 자꾸만 기준을 과거로 돌리기만 한다면 위안은커녕 좌절만이 덮칠 것이다..
내가 요즘 절감하는 바 장애도 마찬가지다. 장애를 갖기 전과 비교하면 안 된다. 추억하는 것은 좋지만,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 한탄하고 억울해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나만 손해고 내 몸만 상한다.
남은 시간 최선을!
신성우의 '서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잔잔한 기타 전주가 끊어질 듯 이어지더니, 싫지 않은 마찰음 뒤에 한국 록을 지키려던 분위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우리 세 사람의 분위기도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아내와 선배에게 번갈아 눈길을 맞추려 애쓰면서 말했다.
"여유까지 부리지 말자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나태와 여유는 분명 다르잖아. 나이는 현실이란 거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나태로 낭비할 순 없으니까. 어쩌면 이 시는 나이란 현실을 통해 나태와 여유를 착각하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일 수도 있어. 여유 있게 살려면 나이 탓만 하지 말고 그만큼 노력도 좀 하라는 뜻으로,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아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그래, 맞아. 오, 이거 이거 우리 남편 다시 봐야겠는걸."
머쓱해진 내가 뭐라 하려는데, 선배 누님까지 아내를 거들고 나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져 아끼고 아꼈던 막잔으로 다시 건배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