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극
위키미디어 공용
대한제국의 국제적 환경이 급격히 불리해지던 그해 11월 3일이었다. 장소는 지금의 서울 남산 기슭의 주한일본공사관이다. 이곳에서 메이지(明治)라는 연호를 쓰는 무쓰히토일왕의 53회 생일 파티가 열렸다. 훗날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의해 친일파로 규정될 이재극이 이날 남산에 올랐다. 왕실 사무를 총괄하는 궁내부대신 자격이었다.
고종황제와 황실을 대표해 행사에 참석한 이재극의 행동은 고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연회장에서 이재극이 축배를 들고 "천황 폐하 만세(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세 번이나 외쳤기 때문이다. 전문가 5인의 감수를 받은 1968년 5월 12일 자 <조선일보> 4면 특집기사 '개화백경(開化百景)'은 "이 말이 고종황제의 귀에 들어갔다"라며 이렇게 서술한다.
"노한 황제는 이재극을 불러 호되게 꾸짖었다. 한국에 있어 당시의 만세는 국왕의 만수를 비는 이외에 써서는 안 되었다. 하물며 궁내대신이 5백년의 전통을 깬다는 것은 불손하다고 힐문했다."
꾸중을 들은 이재극은 멈칫멈칫했다. 그러더니 엉뚱한 해명을 내놓았다. 답변은 이랬다.
"신은 만세라 부르지 않고 반자이라 불렀나이다. 더우기 무관(無冠)으로 불렀사오니 성려(聖慮)에 누가 아니 될까 하옵니다."
고종의 8촌 동생인 이재극은 고종보다 열두 살 어렸다. 이런 관계가 아니었으면 '만세라고 한 적 없습니다, 반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장난을 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만세를 부를 때 관모를 쓰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오늘날에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면 무례하다고 말하지만, 그 시절에는 정반대였다. 만세 부를 때 관모를 벗어 일왕에 대한 불경을 표시했으므로 성상께 염려를 끼칠 만한 일은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고종은 할 말이 없어 말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재극이 이듬해인 1906년 7월까지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사실은 만세 사건으로 인해 문책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을사늑약 직전이라 아직 외교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러시아를 꺾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이재극은 일왕 생일연에서 만세를 외쳤다. 궁내부대신이 보여준 이 행동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종속성이 한층 강화될 것임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그 같은 선제적 행동을 하면서도 그는 신변 안전을 위한 꼼수도 함께 생각해 뒀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다른 손으로 관모를 얼른 벗은 뒤 '만세' 대신 '반자이'를 불렀다. '대한제국 영내에서 외국 군주를 위해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변명할 단서를 만들어둔 것이다.
이재극은 왕족치고는 상당한 실력파였다. 15세 때인 1879년에 종9품 교사인 동몽교관이 된 그는 29세 때인 1893년에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했다. 10대 중반에 교사가 된 일이나 서른 이전에 대과에 급제한 일은 왕족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학업을 열심히 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비서실 차장인 비서원승, 차관급인 내부협판 등을 거쳐 38세 때인 1902년에 법부대신이 된 그는 학부대신 시절인 1904년 10월 일본을 시찰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재극 편은 "귀국 직전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외교관계상 의례적으로 주는 훈장이었지만 1년 뒤 일왕 생일연 때의 모습을 감안하면, 일본을 시찰한 것과 더불어 욱일장 훈장을 받은 경험이 친일파가 되는 데 영향을 줬으리라고 볼 수 있다.
거침없던 이재극의 친일행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