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 펠렛. 양조에는 이 펠렛이 들어간다
윤한샘
작지만 위대한 향미 마법사
홉 송이는 여러 겹의 얇은 잎이 겹겹이 감싼 형태를 띠고 있다. 핵심은 가운데 있는 노랗고 끈적이는 물질, 루풀린(lupulin)이다. 이속에 숨어있는 홉 수지(hop resin)와 홉 오일(hop oil)이 맥주를 수백 개의 향미를 부리는 램프 속 지니로 만든다.
홉 수지는 맥주의 쓴맛을 담당한다. 맥주에서 느껴지는 쓴맛의 99%가 여기서 나온다. 비밀은 홉 수지에 들어있는 알파산(α-acid)이다. 알파산 자체도 약간의 쓴맛을 갖고 있지만, 맥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헐크 같은 존재로 변해야 한다.
알파산을 헐크로 만드는 기폭제는 뜨거운 온도다. 100℃ 이상 끓는 맥즙 속에서 알파산은 이소 알파산(iso α-acid)으로 전환한다. 이소 알파산은 알파산보다 3배 이상 쓴맛을 맥주에 퍼뜨린다. 품종에 따라 홉은 4~15%의 알파산을 품고 있다. 그중 브라보, 매그넘, 워리어, 토마호크처럼 10% 이상의 알파산을 가진 홉을 비터링 홉(bittering hop)이라 하며, 주로 쓴맛을 내는 용도로 사용한다.
양조사는 자신이 디자인한 맥주 레시피에 따라 쓴맛을 조절한다. 강한 쓴맛을 내고 싶다면 홉을 많이 넣거나 끓임 시간을 늘리면 된다. 보통 45~90분 동안 끓임을 진행하며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길어도 90분을 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맥주 색이 짙거나 알코올 도수가 높으면 쓴맛이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색과 알코올은 쓴맛과 관련이 없다.
홉 수지가 쓴맛 마법사라면, 루풀린에 장착된 또 다른 무기, 홉 오일은 향기 마법사다. 양은 미미하지만 쏟아내는 향은 후각을 뒤덮을 정도다. 아직 밝혀내지 못한 향기 물질도 수두룩하다. 리모넨, 제라니올, 리나로올, 피넨, 카리오필렌 등 수백 종의 향 분자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우리에게 익숙한 향을 맥주에 녹여낸다.
제라늄, 장미, 제비꽃 같은 꽃 향과 잔디, 젖은 흙, 소나무를 비롯해 레몬, 파인애플, 오렌지, 자몽 같은 열대과일, 딸기, 라즈베리, 구스베리 같은 베리류 그리고 로즈메리, 타임, 세이지 같은 허브까지 수백 종의 향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알파산은 낮지만 홉 오일이 풍부한 홉은 아로마 홉(aroma hop)으로 분류한다. 영국의 퍼글, 이스트 켄트 골딩스, 챌린져, 체코가 자랑하는 사츠, 독일 출신 할러타우와 슈팔츠는 유럽을 대표하는 아로마 홉으로, 노블 홉(noble hop)이라는 근사한 별명을 갖고 있다. 구세계 홉이라 불리는 이 홉들은 꽃, 허브, 젖은 흙, 풀 향을 영국 에일과 독일, 체코 라거에 풀어낸다.
미국 홉은 떠오르는 신성이다. 20세기 후반 크래프트 맥주 성장과 함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홉의 특징은 풍성한 열대과일과 베리 향이다. 캐스케이드, 모자이크, 시트라, 갤럭시 같은 홉들은 자몽, 파인애플, 망고, 소나무, 라즈베리 향을 가득 안고 있다. 신세계 홉으로 구분되며 최근 몸값이 수직상승하고 있다.
훌륭한 연주자가 있더라도 지휘자가 없으면 무용지물, 수백 종의 홉이 선사하는 수천 개의 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농도를 조절하는 몫은 결국 양조사에 있다. 양조사는 맥주 스타일에 맞는 향에 적합한 홉을 선별하고 언제 어떻게 투입할지(hopping) 결정해야 한다.
수지와 달리 오일은 열에 취약하고 물에 녹지 않는다. 그래서 향을 위한 홉은 일반적으로 끓임 과정 후에 투입한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끓임이 마무리되기 15~20분 전 그리고 막 끝난 후 홉을 넣어 쓴맛과 향 모두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이다.
더 강한 향을 내고 싶으면 이후에 홉을 추가한다. 맥즙 온도가 어느 정도 내려간 뒤 발효 전 홉을 투입하는 것을 레이트 호핑(late hopping) 또는 홉 스탠드(hop stand)라고 한다. 발효가 끝난 후에 홉을 넣는 드라이 호핑(dry hopping)도 있다. 이 방법은 홉 오일 속 향 분자를 맥주 속에 공존시켜 즉각적이고 풍성한 향을 약속한다.
현대 맥주의 주인공, 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