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표적인 민간 싱크탱크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의 토론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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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를 다루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법규와 예산을 조합'한 정책이고, 단건의 정책을 잘 만들기보다는 정책생태계를 조성해 문제에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금의 정책생태계는 국책연구기관으로 단종화한 상태이고, 당연하게도 단종인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정책의 창이 열려야 하는 전국 단위 선거 때에도 정책 논의가 사장되거나, 표심을 현혹하는 단편적이고도 비현실적인 정책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생태계는 단종이 다종이 되었다고 바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책생태계 역시 국책연구기관뿐 아니라 민간 싱크탱크와 정당의 정책기구, 정부와 지자체, 시민사회와 학계, 언론 등이 각자 정책에 대한 역할을 늘려가야 조성할 수 있다.
그중에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민간 싱크탱크다. 민간 싱크탱크는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의 결과물로 정책을 만들고 변화를 촉진하는 것에 집중하고, 이를 위해 학계와 국책연구기관, 시민사회, 언론, 정당과 정부 등 각 주체들을 잇는 다리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국제노동기구(ILO) 고위직에 있는 분으로부터 우리 연구기관의 보고서나 연구성과가 세계 톱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외에선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그 중요성이나 공론화되는 정도는 낮다고 느꼈다"고 밝혔는데, 연구의 공론화에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도 민간 싱크탱크다.
2000년대 희망제작소와 새사연, 시민단체 부설연구소 등의 등장, 2010년대 한국의 브루킹스를 표방한 여시재 등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서로 분절적이었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았다. 서구권처럼 기부 문화가 자리 잡지 않아 몇몇 알려진 곳들을 제외하면 재정 기반이 지극히 열악했고, 정부나 지자체의 위탁 연구과제를 수행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았다.
최근엔 국제적인 협력이 중요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해외 기관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민간 싱크탱크들이 부상하고 있으나, 국내에서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마련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민간 싱크탱크 생태계를 조성할 자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민간싱크탱크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커져 자체적인 재정 기반을 마련해야겠지만, 우선은 자원이 있는 국책연구기관과 정당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이들 기관이 정책 허브 역할을 맡아 민간 싱크탱크와 활발한 협업을 벌이는 형태다.
정당의 부설 정책연구소는 정당법상 국고보조금의 30%를 배정하도록 되어 있어 2021년 기준 배정된 예산이 민주연구원 88억 원, 여의도연구소(국민의힘) 63억 원에 달한다. 국책연구기관 역시 민간 싱크탱크와의 협업을 늘려가며 정책생태계를 함께 키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민간 싱크탱크에서 성과를 내는 사례가 늘어나면 연구자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도 생긴다.
세계 각지에서 복합 위기의 시기마다 걸출한 민간 싱크탱크가 등장했다. 20세기 초중반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도를 그렸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도 몇몇 이상주의자들의 토론 모임에서 비롯했지만 영국의 대표 싱크탱크로 자리 잡았다. 사업가 브루킹스와 몇몇 개혁주의자들이 시작한 브루킹스연구소는 1960년에 케네디 대통령 당선자가 인수위원회를 이 연구소 안에 차릴 정도로 개혁의 상징이었고, 여전히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민간 싱크탱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가 맞은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만 하지 말고, 이참에 문제를 다루는 체계인 정책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한국형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브루킹스의 등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