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의 사촌언니가 지난 1월 18일 가해자 1심 선고(징역 25년) 직후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취재진에게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화빈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피해자가 대신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23년 7월 17일 오전 6시쯤 인천의 한 아파트 복도에서 출근하던 최나연(30대, 가명)씨가 옛 연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숨졌다. 가해자와 같은 직장에 다녔던 최씨는 심해지는 집착에 이별을 통보했는데,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의 폭행을 당하고 4개월 동안 스토킹에 시달렸다.
사건 발생 약 한 달 전, 최씨의 경찰 신고 후 가해자는 흉기를 구입했다. 이후에도 최씨 주변을 맴돌며 동선을 파악한 그는 스토킹 현행범으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결국 범행을 저질렀다.
보복살인죄는 일반살인죄보다 형량이 더 무겁다. 가해자는 당초 수사기관에 "스토킹 신고로 현행범 체포가 돼 화가 나 칼을 구입했다"고 진술했으나, 이후 "보복 목적이 아니었다"고 말을 바꿨다. 경찰은 최씨가 겪은 스토킹 피해를 없는 일 취급했고, 가해자에게 일반살인죄를 적용했다. 검찰 공소장엔 보복의 중요한 증거인 가해자의 흉기 구입 시점 등이 빠졌다.
최씨의 사촌언니는 발인을 마친 뒤 공소장을 받아 든 날을 떠올리며 "오로지 피고인의 이야기만 듣고 작성된 공소장"이었다고 말했다. 빽빽하게 나열된 활자 어디에도 스토킹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고 그때부터 공소장 변경을 위한 사촌언니의 싸움이 시작됐다.
"가해자와 나연이가 같은 직장에 다녔는데도 경찰은 직장동료들에게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어요. 경찰은 (가해자가) 현행범이라 살인 동기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봐요. 스토킹이 왜 살인으로 이어진 건지, 가해자가 보복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지 (경찰의 수사만으론) 알 수 없었어요." - '인천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언니
사촌언니는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가해자가 어떤 주장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법원은 수사자료의 열람·등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 600만 원을 들여 수사자료를 보게 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800여 쪽 자료 중 200여 쪽이 제공됐는데 정작 수사기관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목록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가해자는 수사자료는 물론 유족이 제출하는 탄원서까지 열람했고 이를 토대로 수십 장의 반성문을 써 법원에 냈다. 이 반성문 또한 유족은 볼 수 없었다.
사촌언니는 경찰 대신 직접 직장동료를 만나 '최씨가 스토킹 피해를 당했다'는 진술을 수집했고, 이를 토대로 법정에 나가 이 사건이 보복살인임을 증언했다. 최씨의 노트북을 샅샅이 뒤져 스토킹 증거(통화 녹음, 카카오톡 대화) 또한 찾아내 법원 탄원서에 담았다.
사촌언니는 지난해 12월 5일 변호사를 통해 피고인의 죄명을 일반살인죄에서 보복살인죄으로 변경해 달라는 의견서를 법원에 냈다. 3일 뒤 검찰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재판부에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고 법원은 이를 허가했다. 이후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법원은 보복살인죄를 인정하며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사촌언니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1심 선고 뒤 "가해자가 이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돼야 남겨진 유족들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한주현 변호사(법무법인 정진)는 "(수사기관이) 피의자(가해자)를 송치·기소하려면 피의자 진술조서를 증거로 쓰기 위해 명확한 절차를 거친다"라며 "(그러나) 피해자의 얘기는 전적으로 수사 주체의 판단 사항이다. 특히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피해가 명확한데 굳이 더 조사할 게 있을까'라고 판단되면 수사가 진척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는 CCTV와 같은 객관적 증거들, 피의자의 주장과 목격자 진술 등을 알아야 대응할 수 있는데 (수사자료의) 열람·등사 신청은 대부분 거절된다"며 "심지어 피해자가 증인으로 출석해 발언한 내용이 담긴 녹취록도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28일 형사소송법 개정을 입법 예고(열람·등사 신청의 불허에 대한 이의 제기 가능)했지만, 실효성엔 물음표가 붙는다. 한 변호사는 "피해자가 불복할 절차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현장에서 유효할지는 모르겠다"고 의문을 표시했다.
*<국가의 2차가해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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