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성과 기억교실.
이지성
이지성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참여했던 구술 기록(그날을 말하다 <도언 엄마 이지성>)에는 그가 참사 초기에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나며 딸이 탔던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참사 일주일 뒤, 살아있길 바랐던 도언이가 바다에서 주검으로 올라왔다. 못다 핀 자식의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동안 폐인처럼 살았다. 위로하러 집에 들른 형부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도언이 장례식장에서 단원경찰서 형사인 후배를 만났는데, 유가족 집마다 사복경찰이 두 명씩 붙더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아이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엄마가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안 되지 싶었다. 그때부터 분향소에 매일 아침에 나가 새벽에 귀가했다. 유가족들과 전국을 돌고 해외까지 나가서 진상규명 활동에 앞장섰다. 몸이 부서져라 서명받고 간담회를 하고 농성하고 걷고 싸우고 한뎃잠을 자는 날이 이어졌다.
참사 1주년 이틀 후인 2015년 4월 18일,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근혜장벽(차벽)'으로 둘러싸고 '캡사이신 물대포'도 모자라 유가족들을 폭행하고 경찰버스로 끌고 갔다.
그날 유가족 엄마들과 광화문 현판 앞에 있었다. 경찰들에게 연행되지 않으려 버스 밑으로 기어들어가 연결선을 붙잡았다. 다시 선두에 서서 청와대로 가려다 몸싸움이 붙었다. 앞에 선 기동대원이 모자를 벗기면서 머리를 잡아당겼다. 상대의 헬멧을 벗기고 머리를 맞잡았다. 기동대원이 때리고 캡사이신을 얼굴에 비벼도 상대방이 손을 놓을 때까지 붙들었다. 벗겨진 모자는 도언이의 모자였다. 슬픈 만큼 모질어져야 했다.
참사 초기, 기록활동가들이 유가족과 만든 4.16기억저장소는 세월호참사 기록을 모으던 민간단체였다. 오래전부터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임원들이 기억저장소 소장을 맡아달라고 누차 부탁했다. 매번 손사래를 쳤지만, 고심 끝에 기억저장소로 가기로 결심했다. 세월호참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4.16기억교실(당시 단원고 2학년 존치교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2016년 7월, 기억저장소에 소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기억저장소는 거래처에 결제 대금이 쌓였고 실무자 월급도 밀려 있었다. 수집한 자료들은 어디 뒀는지 찾기 어려웠다. 먼저 가장 친한 유가족 부모 8명을 가족운영위원으로 데려왔다. 꾸준히 함께 할 전문가와 지지자들도 외부운영위원으로 섭외했다. 무너졌던 운영위원회를 다시 일으키려 듬직한 일손들을 불러왔다.
그때부터 가족운영위원 엄마들하고 방송국과 행사장을 다니며 기억저장소를 알렸다. 연말까지 2600명 이상의 '기억회원'을 모집했다. 1억 원 이상의 후원금이 모였다. 부임하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후원금을 모으면서 모든 기억저장소 실무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했다. 아이들 목숨값으로 모은 돈이니 아이들을 위해 값지게 써야겠다 다짐했다.
이후 26년 차 기록관리 경력자 이은화를 기록팀장으로 영입하며 기록물 관리를 체계화했다. 세월호 인양 후 쏟아져나온 희생자 유품도 전문가들의 도움과 자문을 구해가며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 기억저장소 엄마들, 실무자들과 함께 막막하고 힘겨운 시간을 헤쳐갔다.
"만드는 건 쉬워도 지키는 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