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6단원고가족협의회 활동 사진2.
김정화
정화씨는 "0416단원고가족협의회가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으로 모였지만, 지금까지 모임이 유지되는 건 세월호를 알리려는 목적 하나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안산 지역주민들이 내민 손길을 맞잡을 여력이 없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려 자꾸 모인다고 했다. 새해에는 노인정에서 떡국떡을 나누거나, 어린이날에 선물꾸러미를 나누며 안전 캠페인을 했다.
안전에 대한 정화씨의 고민이 깊어지던 사이,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조카를 따라 몇 번 가본 이태원 거리에서 벌어진 참사에 정화씨는 다시 세월호가 떠올랐다.
"이태원은 늘 사람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엔 어른들이 잘 안 가요. 진작부터 어른들이 그곳에 관심을 갖고, 안전사고의 위험이나 문제들을 발견했다면 젊은 청년들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길거리에서 주검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너무 황당하잖아요. 세월호도 그래요. 증축하면 안 되는데 증축했고, 원래 우리 아이들이 타려던 배도 아니었고. 대형 참사를 들여다보면 평소에 문제가 있어도 그냥 내버려두다 사건이 터지면 우왕좌왕하기 바빠요."
재난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안일하게만 생각했던 작은 문제들이 모여서 점점 커지고, 재난으로 일상을 덮쳤다. 노동자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사망한 사고도, 제천 화재도, 이태원참사도,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정화씨가 보기에는 모두 세월호참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건처럼 보였다. 그가 참사와 죽음의 행렬에도 계속 싸우는 이유가 있다.
"안전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안전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나 혼자서 어떤 희망을 걸고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고 있는 것에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고 싶어요."
"위로가 그렇게 힘든가요?"
광화문에 설치된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하라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통보 후, "한 번 더 이사 가자"라는 문구가 적힌 유족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아래에 "이제는 제발 그만하라"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글이 빼곡했다.
"저는 정치 잘 몰라요. 그냥 싫어요. 이젠. 우리가 원하는 거는 돈도 아니고, 정쟁도 아니에요.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며 우리 마음을 알아주는 거예요. 위로가 그렇게 힘든가요?"
정화씨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는가 하면, 유가족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기쁨도 슬픔도 적당히 감춰야 했다. 게다가 0416단원고가족협의회의 위원장인 만큼 힘들면 안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느샌가 정화씨는 주변의 시선에 자신의 감정을 맞춰가고 있었다.
문득 슬픔 속에 사는 엄마를 하늘에서 보고 있을 딸 빛나라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다시 자신을 찾으려 애썼다. 여러 취미 활동을 하고, 공부도 했다. 자신과 일상을 되찾는다고 해서 딸을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느끼는 감정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는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유족들을 보면 '저게 뭐야' 하고 안 좋게 보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겠죠.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같은 유가족한테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긴 시간 자신과 딸을 동일시 하다 이제는 딸의 부재를 인정하는 한편, 자신의 속도대로 일상을 보내는 정화씨는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각자가 가진 속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웃고, 떠들고, 즐거운 일상을 산다고 해서 우리 빛나라를 잊은 게 아니잖아요. 이건 내 삶이에요.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작은 것부터 조금씩 해나가고, 다시 내 삶을 사는 게 먼저 떠난 우리 딸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정화씨에게 시간은 약이 될 수 없었다. 청소년기에서 멈춰버린 딸의 시간을 간직한 채 성인이 된 모습을,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시간이 지나서 잊히기는커녕 그리움만 늘었다. 둘째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도, 빛나라양이 사망했던 18살이 되던 때도 자꾸만 불안했다. 다른 학부모들도 정화씨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모인 0416단원고가족협의회는 그 불안과 트라우마를 동력 삼아 이제 모든 이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작게나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대형 참사를 겪고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언제까지 이어갈지 모르는 이 싸움을 앞둔 정화씨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다고 말했다.
"두려움요?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자식을 잃고 나니까 두려운 것도 없어요. 다른 사람의 오해나 시선도 무섭지 않고요. 싸움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바라는 게 있다면 세월호 10주기에 정치인들 늘상 하는 보여주기식 요식행위 말고,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고 또 나라가 아이들을 안전하게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나라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이 그토록 말하던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정화씨에게 이제는 과거가 됐다. 정화씨는 딸 김빛나라를 품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걷는다. 그것이 세월호 10주기를 앞둔 정화씨의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