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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의 봄>은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 사건,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인 12.12 군사쿠데타를 다룬 영화다. 먼저 밝혀두자면,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고 재밌게 봤다. 이미 900만 명이 넘게 본 영화인만큼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이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좋은 비평도 많이 나왔으니 나는 이 영화가 상정한 구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특히 손희정 영화평론가가 <한겨레> 칼럼에서 이야기한 '육사 나온 정치군인과 갑종 출신 참군인'이라는 대립 구도라는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말해보고자 한다.

육사를 나와 박정희의 쿠데타에 참여했고(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 주도),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스스로도 쿠데타를 성공해 권력을 잡은 정치군인 전두광(황정민 분). 그리고 갑종출신으로 인맥도 학연도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살아남아 투스타에 오른 참군인 이태신(정우성 분)의 갈등 구도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구조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납작한 구조인데,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가 영화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나는 이 납작한 이분법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구조에 도사리고 있는 군사주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군인 전두광은 예외적 존재일까?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주인공이자 빌런인 전두광은 그야말로 관객들의 분노유발자다. 사실 전두광의 모델인 전두환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미 현실세계에서 비호감도가 높은 인물이다. 지난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비호감도 71%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1212 사건 이후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일, 이후 1987년까지 이어진 독재까지, 전두환이 비호감인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나라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꿰차고 독재를 일삼은 정치군인이라는 점이 전두환(혹은 전두광)의 악역 캐릭터의 핵심이다. 

그런데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는 '정치군인'이라는 존재는, 총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본업이어야 하는 군인들의 예외적인 상태일까? 쿠데타는 군대가 오작동한 결과가 아니라 군대의 정상적인 작동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한다. 전두환 이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스스로 군사혁명이라 부르며, 혁명 공약을 내세우고 말미에 혁명 과업이 성취되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밝혔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와 전두환만, 다시 말해 한국만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군대의 쿠데타는 일상이다. 외국군대와 싸워본 지 100년이 넘었다는 태국 군대는 지난 100년 동안 쿠데타만 19번을 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자 하는 정치군인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군대 자체의 속성이다. 쿠데타를 하는 군대가 따로 있고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군대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군대는 젠더화된 군사주의를 작동원리로 삼는다. 군사주의는 일반적으로 군대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사회 일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 혹은 갈등 상황 등 여러 사회문제에서 군사적 수단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뜻한다. 군사주의의 세계관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눈다. 정의와 불의,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부정의인지 묻지 않고 이미 정해진 정의를 위해 아군의 승리를 목표를 군사적인 수단으로 쟁취한다.

무엇이 정의냐는 질문은 용납되지 않으며 이미 정해져 있는 정의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아이러니는, 충돌하는 두 집단 모두 스스로를 정의로 여긴다는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쪽이나 쿠데타를 막는 쪽이나 각자가 스스로를 정의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절멸해야 하는 불의라고 여긴다. 이를 위해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또한 젠더화된 군사주의는 가부장제와 적극 공모한다. 가부장제는 안보 영역에서 두 가지 층위의 이분법으로 작동한다. 보호하는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이 한 층위이고,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와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가 두 번째 층위다. 보호받는 자와 보호하는 자로 나뉜 세계에서 민주적 시민의 역할은 제한된다. 또한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과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 나뉘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인권과 휴머니즘의 가치를 배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의 정치는 폭력의 정치다. 그것이 정의로운 전쟁이든, 정의롭지 못한 쿠데타든 다르지 않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사익을 위해 쿠데타를 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정치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고, 그것은 군인으로서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다는 것이 우리가 쿠데타를 바라볼 때 기억해야 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우리를 열받게 한 전두광이라는 존재는 참군인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군대의 본질적인 모습이 1980년대 한국이라는 역사성 속에 발현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군대의 본질이 쿠데타와 멀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군인정신을 회복하고 참군인을 칭송하는 게 아니다.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답을 군대 밖에서 찾아야 한다. 그 지점에서 이태신이라는 인물을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신의 정의로움은 군인정신 때문일까?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태신은 전두광의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다. 극 중 이태신은 하나회 같은 정치군인 집단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묵묵하게 국토방위에 힘쓰는 진짜 군인을 표상한다(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참군인' 이태신은 집에서는 똑똑한 아들과 헌신적인 아내를 사랑하는 '진짜 남자'다). 이태신은 패배가 자명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고, 자신의 결정에 총구까지 겨누며 반발하는 부하를 향해서도 '귀관은 내가 인정하는 유능한 사령관이다. 부하들을 지키기 위한 귀관의 선택이 옳다고 결정했다면 방아쇠를 당겨도 좋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사적인 조직을 만들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달려가는 전두광과는 이태신을 여러모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사실 이태신의 에피소드들은 역사에 기반한 이 영화에서 픽션이 가장 많이 들어간 지점일 것이다. 이태신이라는 인물의 정의로움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전두광과 이태신 사이에는 현실과 정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많은 군인들이 있다. 행주대교를 지키는 30사단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쿠데타가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한 쿠데타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면 저항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이태신은 끝까지 쿠데타 세력과 맞서 '군인답게' 싸운다. 영화는 이태신의 정의로운 행동을 책임감 넘치는 참군인의 군인정신의 발현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태신의 정의감을 군인정신에서 찾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군대는 본질적으로 폭력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집단이다. 폭력이 충돌하는 현실에서 한쪽만 정의로운 경우는 없다. 유대인 학살로 악명을 떨친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 연합군은 나치 패망 이후 독일로 진격해 수많은 독일 여성을 강간했다. 푸틴의 전쟁범죄는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로 자명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을 학대하는 영상을 찍은 다큐를 본다면 우리는 정의를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수많은 전쟁에서 양쪽 모두가 민간인 학살과 강간 같은 끔찍한 전쟁 범죄를 반복한다. 전쟁범죄는 소수 군인의 일탈이 아니라 전쟁의 본질이다. 이태신의 행동을 군인정신의 발현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해석할 수 없다. 군인정신이라는 서사로는 젠더화된 군사주의가 시민을 안보의 주체에서 삭제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폭력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군인정신이 아니라 사유하는 개인, 양심의 목소리를 귀 기울일 줄 아는 시민성이라는 점이다. 

군대의 폭력을 제어하는 건 민주적인 시민들의 양심에 따른 저항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27일 만인 18일 오전 11시, 900만 관객을 넘었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상영관 광고판에 <서울의 봄>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27일 만인 18일 오전 11시, 900만 관객을 넘었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상영관 광고판에 <서울의 봄>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다. ⓒ 이정민
 
이태신의 용기 있는 행동이 무척 중요한 이유 또한 그것이 군인정신의 발현이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맥락, 개인의 양심이라는 측면에서다. 폭력을 본질로 삼는 군대를 제어하는 핵심은 시민들의 양심에 기반한 저항이다. 실제로 이러한 저항하는 개인들이 존재가 전쟁을 멈추고 전쟁범죄를 성찰하게 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에는 수만 명에 달했던 병역거부자들, 적군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의 등장이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에게 발포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거부한 당시 전라남도경찰국장 안병하의 행동은 어떠한가. 우리는 안병하 경찰국장의 덕분에 인간성이 처참하게 무너진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서 시민과 양심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태신의 행동에서, 김준엽 헌병감(김성균 분)과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만식 분), 오진호 소령(정해인 분)의 행동에서 군인정신이 아니라 양심적인 시민을 찾아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상관의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아니라, 군인 이전에 시민으로서 민주주의를 숙고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의 저항이야 말로 우리가 군대의 폭력과 폭주를 막고 군대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전두광 부대의 장병들이, 혹은 1980년 5월 광주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자. 그리고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해 보자. 나는 군인정신이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시민의 양심이 민주주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개제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figtree1980/244


#서울의봄#참군인#양심#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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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게 되고, 평화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출판노동자를 거쳐 다시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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