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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신라에 원효가 있었다면 고려에 지눌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뚜렷한 주체적 자각을 소유한 인물로서 독자적 노력에 의하여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 냈다. 해외유학승이 해외에서 전수받은 일정한 종파적 경향을 선양하는 데 진력한 것에 비하면, 이들은 어느 학파나 종파,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고 자유롭게 섭렵하여 위대한 한국혼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선각들이다. 이들에 의해 한국불교의 주춧돌이 놓여지고 방향이 정립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송천은, <지눌>, 박성수·이이화 편 <한국의 원형을 찾아서>)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 1158~1210)의 속성은 정씨이며 국학(國學)의 국정(國正)인 아버지 정광부와 어머니 조씨 사이에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출가하여 학구에 전념, 25살이 되어 승려들의 지도자를 뽑는 국가고시인 승선(僧選)에 합격했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버리고 구도행각에 나섰다. 발길 닿는 곳이 전라도 창평의 청원사였다.

여기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므로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앎이 있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며 항상 자제하느니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어서 <화엄경>을 읽고 더욱 정진하였다.

지눌이 41세 되던 해, 그의 모든 의심은 씻은 듯이 다 없어지고 드디어 진리는 확인되었다. 피나는 정진은 마침내 고비를 넘긴 것이다.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참선을 하는 여가에 <대혜어록(大慧語錄)>이라는 책을 읽다가 대각(大覺)를 성취한 것이다.

이로부터 53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지눌은 순천 송광사에서 자기의 괴로움을 돌보지 아니하고 저술 또는 설법을 통해서 중생제도에 전념하였다. 지눌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그가 진리를 깨달은 후 순천 송팡사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정배, <지눌 수심결>, <한국의 명저(2)>)

고려조는 불교를 국교로 삼는 불교국가였다. 왕실의 보호가 따랐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이 왕실의 비호를 입은 관불교의 거목이라면 지눌은 민중불교의 거목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그는 불교의 순수한 실천을 위해서만 살았던 선승이었다. 불교의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도 주도자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고 시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배격했다."(송천은, 앞의 책)

혹독한 무인정권 시대에 지눌은 권력과는 거리를 두면서 수행과 설법을 계속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수십결>, <권수정혜결사문>, <계초심학인문>, <진심직설>,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화엄론절요>, <법집별행록절요> 등이다. 대표작이라 할 <수심결(修心訣)>은 우리나라 선종(禪宗)을 형성한 고려시대 불교의 명저로 꼽힌다. 또한 그의 사상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가 <돈오점수설>이다. 지눌은 '돈오(頓悟)'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간을 물질적으로만 해석하여 육체만이 인간의 전부로 알고 인간이 마음은 망상을 일으키는 나쁜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자성(自性), 그대로 '진리의 몸(법신)'이며 자기의 영지(靈知)가 그대로 참다운 부처인 줄을 모른다.

따라서 이들은 부처라고 하면 무조건 자기 아닌 딴 것으로 알고 이를 밖에서 찾는다. 그러나 부처가 밖에서 찾아질 리는 없다. 그러니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선지식을 만나면 그의 지도 아래 한 생각을 돌려 자기 자신을 살필 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성은 원래 번뇌가 없고, 무궁무진한 부처님의 지혜를 본래부터 완전 무결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부처님들과 조금도 다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이것이 돈오라 한다.(지눌, <돈오점수설>)

지눌의 수제자 혜심이 스승의 저술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의 발문을 통해 선교(禪敎) 합일을 위한 지눌의 의도를 잘 정리하고 있다.

선과 교의 어느 하나에 편착되어 다른 쪽을 배척하며 길이 원수처럼 모순되는 종파로 대립하는 것은 불법이 심히 쇠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은 불심을 가리킨 것이오, 교는 불어(佛語)를 가르킨 것이다. 선이 근원에 속한다면, 교는 가지에 속하는 것이다.(송천은, 앞의 책)

<수심결>의 주요 내용을 통해 지눌의 불심의 일단을 살펴본다.

이 세상 괴롭기가 마치 불난 집과 같거늘 어찌 그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감수하고만 있을 것인가.

괴로움이란 곧 헤맴이다. 헤맴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님을 찾아야만 한다. 부처님은 내 마음을 떠나 따로 없다. 부처님을 어찌 밖에서 찾으려 하느냐. 내 마음을 살펴야 한다.

사람의 육체란 일시적인 존재이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 않더냐? 그러나 참된 마음 자리는 푸른 하늘처럼 없어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곧 썩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신령한 '한 물건'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다.

정말 안타깝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내 마음이 '참 부처님'인 줄을 알지 못 하며, 자기 성품이 '참법'인 줄은 모르고, 법을 구하되 멀리 성인에게서 찾고, 부처님을 찾으면서도 자기 마음은 살피지 않는구나.

지눌은 평생을 대중들과 함께 하면서 입적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대중을 모아놓고 법상(法床)에서 즐겁게 설법하다가 앉은 채 입적했는데 그 모습이 생시와 같아서 7일 동안 그대로 안치했음을 비문은 밝히고 있다. 보조 지눌 이후에 계속해서 16국사가 출현할 정도로 그의 정신적 유산을 위대했으니 후세 수도인의 사표라 아니할 수 없다. (송천은, 앞의 책)

 

#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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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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