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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도 주민
보길도 주민 ⓒ 완도신문

지난달 21일, 사수도 분쟁과 관련해 보길도 주민들을 취재에 나섰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취재는 조심스럽게 이뤄졌으며, 어장에 바쁜 어민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보길면사무소에서 지역대표를 만났다.
 
 김종률 예송리 전 노인회장, 김창근 예작도 이장, 개발위원장 김치국님
김종률 예송리 전 노인회장, 김창근 예작도 이장, 개발위원장 김치국님 ⓒ 완도신문

"섬사람들은 이네기를 잡아야만 결혼식을 할 수 있었죠."

김창근(66세) 예작도 이장은 상어잡이를 했던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잔치음식으로 인기를 누렸던 칠성상어를 예작도 어민들은 '이네기'라고 불렀다. 은상어, 참상어 등 다양한 종을 섬사람들은 즐겨 먹지만, 그 중 최고로 여겼던 상어는 이네기. 주로 회를 썰어서 잔칫상에 냈다. 일반고기는 회를 썰 때 그대로 펴지는 것에 반해 이네기는 살결이 알록달록한 꽃모양을 띠는 게 특징이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이네기를 한 배에 30여 마리도 잡은 적이 있었고, 보통은 10여 마리 정도 잡아야 만선의 깃발을 올렸다. 섬사람들은 상어 철에 맞춰서 결혼식을 했다. 한 마리에 50만원을 호가하는 비싼 가격에 거래했어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니, 이네기의 인기는 대단했다. 어민들은 해남을 비롯해 목포 인근까지 거래처를 확보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는 노를 저어 가는 '노전배'를 주로 사용했고, 60년대 부터는 기계배가 들어왔다. 김 이장은 16세 때부터 66세 까지 어장을 했다. 거의 40년 동안 통통배를 타고 다니며 상어잡이를 한 것이다. 그렇게 3대에 걸쳐 사수도 바다에서 어장을 했고, 밤에는 정어리멸치를 주로 잡았다. 

예작도는 마을 전체가 어장을 해서 먹고 살았다. 4~5명씩 조를 짜서 사수도 해역에서 어장을 관리했고, 배에서 먹고 자는 일은 예삿일이었다. 섬에는 농사가 없기에 자손 대대로 어장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때 보길면 예송리는 100여 가구 살았는데, 배를 만들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어장을 했다. "고인이 된 예송리 사람 윤주빈 씨가 날마다 노를 저어 사수도 까지 다녔던 건장한 사람이었다"며 모두가 그를 기억했다.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상어잡이는 이듬해 5월까지 이어졌다. 예작도 어민들은 1년 중 절반을 상어잡이에 매진했다. 30가구 살았던 예작도 마을 전체가 상어잡이에 나섰고, 보길도 예송리는 배를 만드는 10여 명의 젊은 층들만 상어잡이에 나섰다.

김종률(88세) 보길면 예송리 전 노인회장은 사수도를 제주도에 뺏긴 사실을 모르고 아직도 분쟁 중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는 "밤새 생각했는데, 그 상황을 알고는 너무 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조부님 함자가 김정형(金鼎形)인데, 보길면장을 지내던 당시 추자도는 보길면에 속했다. 보길면 행정업무를 직접 관할했으니, 조부께서 추자도 사람들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때 추자도 사람들은 돛을 3개씩 달고 다니는 큰 배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태풍도 견딜만한 배였다. 예송리 앞바다의 지형이 배를 정박하기 편해서 연료를 사려고 추자도 어민들이 수시로 보길도에 왔다. 나무와 기타 필요한 것들을 보길과 노화에서 주로 사갔다고. 

그가 10대 때도 그랬는데, 20대 군인 제대할 때까지도, 30대인 60년 대 초반 까지만 해도 바다경계는 무질서했다. 오래전에 제주도가 자치도로 승격되어 전라도가 분리되고, 보길도에 딸린 추자도가 제주도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제주도지사가 추자도민을 위해 나서서 사수도 문제를 관여한 것인데, 그러면, 전라남도지사는 여태 뭐했냐? 완도군이 알아서 하라며 마냥 미뤄버린 것 아니냐"며 성토했다.

그가 젊어서 예작분교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정씨 형제가 큰 배를 가지고 예작도에 이사를 왔다. 여수에서 온 정성준씨 형제였다. 비슷한 시기, 경상도에서도 형제가 이사 왔다. 예작도에서 살면서 그들은 사수도 바다에서 어장을 해 먹고 살았다.  

그들은 돛을 돌돌 말아서 어깨에 들쳐 메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였다. 사수도에는 주로 멸치잡이를 다녔다. 그 바다에는 정어리멸치가 많이 나왔다. 보길도 선창리 마을에서도 10여 가구 정도가 상어잡이와 멸치잡이에 나섰다. 그때는 여수나 고흥 어민의 고깃배도 사수도로 자주 밀려들었다. 전라도 어민들의 공동 어로구역이나 다름없었다. 사수도 인근 해역은 전남도어민들이 수시로 다니며 고기잡이를 했어도 분쟁 같은 건 없었다.

"그때는 거의가 노를 저어 가는 노전배로 다녔제"라며 김치국(65세) 보길면 개발위원장은 노를 저어 다니던 그때를 떠올렸다. 추자도나 제주도에서 노를 저어 사수도까지 오려면 거리상 어려웠다. 보길도에서 노를 저어 가면 사수도 앞바다는 금방 닿을 수 있었다. 보길도, 소안도 사람들은 사수도를 가까운 거리로 여겨 매일같이 노를 저어 바다를 누볐다. 

그는 "사수도에 집터가 하나 있는데, 소안도 사람이 옛날에는 거기에서 살았다"고 전했다. 그 후로 추자도 해녀들이 사수도에 막사를 짓고 물질하러 다녔다. 김씨는 어장을 하다가 바람이 불면 사수도에 가서 잠시 바람을 피하기도 했다. 북서풍이 불면 제주도 방향으로 배가 흘렀고, 남동풍이 불면 보길도 쪽으로 배가 흘러갔다. 

추자도가 제주도 소속이 된 이후로 전남은 어업구역이 사라졌다. 고기는 사수도 안쪽 해역에 다 있을 만큼 그곳은 황금어장이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한 숨을 내쉬면서 "여그가 우리 전라도 땅인데, 어느 날 갑자기 추자도가 제주도에 속하면서 사수도 까지 다 뺏겨 부렀어. 이런 멍청한 짓을 누가 했냐"며 혼잣말 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때도 바다의 경계선을 침범한다고 제주도에서 나온 단속 배들과 시비가 자주 붙었다.

그는 "추자도를 준 것만도 감사해야지, 사수도 까지 주라고 해? 차라리, 보길도 까지 너네 것이라고 해부러라. 이게 말이 되느냐"며 사수도를 꼭 지켜내야 하는 이유를 피력했다. 

보길도 이난용씨도 사수도에 약초를 캐러 다닌 마을 사람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 섬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고, 소안도 사람이 사수도에 거주한 것으로 들었다"며 집터의 흔적과 마을의 약초꾼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을별로 집중 취재에 나서려고 했지만, 어장 때문에 바쁜 어민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김현주 보길면장님의 도움으로 면사무소에서 주민대표를 만나 취재한 내용들이다.

보길도와 예작도 사람들은 '장수도'를 '사수도'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수도 해역은 오랫동안 완도 바다였으며, 전라남도민의 영역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사수도 분쟁은 전라남도 차원에서 행정이 적극적으로 법적업무를 수행해 주기를 당부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추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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