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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12.12 군사반란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연일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가운데,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티브가 됐던 실존인물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사력을 다해 쿠데타를 저지하려고 동분서주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등이 바로 그들이다. 군사반란이 성공한 후 이들은 신군부에 의해 군에서 축출된 후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영화 속에서 정우성이 열연한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의 실제 모델은 장태완 장군이다. 1931년생인 장태완은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를 다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19세의 나이로 전시 장교양성 기관이었던 육군종합학교 11기로 입교했다. 당시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종합학교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보병학교의 교육기능을 통합해 9주~16주간의 단기교육을 거쳐 초급 장교들을 배출했다. 이른바 갑종(甲種)장교들이다.

1950년 12월 소위로 임관한 장태완은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 26연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해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51년 9월 향로봉 전투에 투입되어 결사대를 이끌고 향로봉 북쪽 924고지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당시 신문에는 '장태완 소위가 이끄는 결사대가 혈전 끝에 향로봉을 점령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엔 중대장으로 수도고지 전투, 금화지구 전투를 치렀다.

정치 군인에 문제의식... '사상 불순자'로 몰리기도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예비역 육군소장.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예비역 육군소장. ⓒ 이종호
 
ⓒ 최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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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관 장교 시절부터 군인들의 정치개입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1965년 수도사단 작전참모(중령) 시절 사단이 베트남 파병부대로 선발됐는데, 그는 신원조사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장태완이 육군대학 졸업논문에서 '정권유지 차원에서 지나치게 비군사적으로 활용돼 군 기강을 문란 시키고 군의 단결을 저해시킨 보안사령부를 해체하고 모든 정보부대를 통합해 순수 군사정보지원 업무만 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 대목을 보안사가 문제 삼은 것이다.

졸지에 '사상 불순자'가 되어 파병 부적격 판정을 받았던 장태완은 우여곡절 끝에 1965년 10월 맹호사단 1연대 1진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어 이듬해 9월 대령으로 승진한 후 귀국했다.

1973년 4월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장태완 준장은 하나회 보스였던 전두환과 악연을 맺게 된다. 방공진지 공사 현장 순시를 나갔다가 수경사 방공포대대장 김상구 중령(훗날 주 호주 특명전권대사, 12·14대 국회의원)을 질책했는데, 김 중령이 대들자 그를 영창에 보내 버린 것. 결국 이 일로 김 중령은 군복을 벗었다. 육사 14기였던 김 중령은 하나회 회원이었고 전두환의 손아랫동서였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20여 일 후인 1979년 11월 16일 장태완은 수경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부임 직후 작전참모를 시켜 파악해보니 수경사의 중대장급 이상 간부는 거의 '하나회' 장교였다고 그는 훗날 저서에서 밝혔다. 당장 수경사 예하 5개 단(團) 중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육사16기, 대통령경호실장·국가안전기획부장),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육사17기, 육군참모총장), 헌병단장 조홍 대령(육사13기, 대한손해보험협회장) 등이 모두 하나회 회원들이었다.

쿠데타 진압 실패... "억장 내리치는 것 같았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부임한 지 24일 만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 쿠데타가 발생했다. 장태완은 군사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수경사 근무 장교 450여 명 중 대다수가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고, 그날 밤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한 장교들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장태완은 사령부에 근무하는 100여 명의 장병들을 긁어모아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반란군 지휘부를 진압하려 했지만, 끝내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13일 새벽 장태완은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육사21기, 육군본부 헌병참모부장)에게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압송됐다.

보안사 특수수사대 조사를 받으면서 두 달 동안 장태완의 몸무게는 10kg 넘게 빠졌다. 결국 그는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전역지원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심정을 장태완은 지난 1993년 펴낸 저서 <12.12 쿠데타와 나>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6·25 전쟁 발발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군문에 투신하여 3년 전쟁 동안 무수한 사선을 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군 생활을, 명예롭기는커녕 12·12의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충의 죄인이 되어 반란 주모자들의 강압에 의해 30년 동안 몸담아 왔던 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서운한 생각이 억장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장태완의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후에도 반년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관악구 봉천동의 24평짜리 좁은 집에는 보안사 요원들이 상주하며 장태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풀려난 지 두 달 만에 그는 부친상을 치러야 했다. 장태완의 아버지는 아들이 반란군에게 체포된 후 '옛부터 역모자들의 손에서 (충신이)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우리 역사'라면서 막걸리 외에는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1982년 1월에는 외아들 성호(1962년생)가 행방불명됐다가 한 달 만에 부친의 무덤 근처인 경북 왜관의 낙동강 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자신이 반란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고, 보안사 요원들이 수시로 집을 드나드는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공부를 곧 잘해 1981년 서울대학교 자연대에 수석 입학했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성호의 시신을 싣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장태완은 꽁꽁 얼어붙은 아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대면서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언제나 장태완을 괴롭혔다. 사건 직후부터 화병에 시달렸던 그는 하루 세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독한 술을 들이켰다. 수면제를 먹고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어 10여 가지의 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한 결과 1987년에는 10여 시간의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난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장남 김홍일 민주당 의원 후원회에 참석한 김경천, 장태완, 최명헌 당시 의원.
지난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장남 김홍일 민주당 의원 후원회에 참석한 김경천, 장태완, 최명헌 당시 의원. ⓒ 이종호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장태완은 1993년 7월, 12·12 당시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 아래 있었던 장군 22명과 함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반란에 참여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이듬해 검찰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면서도 관련자들을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 처분했지만, 장군들의 고소는 이후 1995년 12월 '5.18특별법과 공소시효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디딤돌이 됐다.

12.12와 5.18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하도록 한 특별법에 따라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박종규, 신윤희, 정호용 등이 구속·기소됐다. 장태완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하기도 했다. 1997년 대법원은 "12·12는 명백한 군사 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적시,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설령 성공했더라도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미완으로 남게 된 기록... "이것은 나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다"

장태완은 1994년 사상 처음 경선으로 진행된 27대 재향군인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한차례 연임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장태완은 2002년 16대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의 보훈특보를 맡기도 했다. 2004년 은퇴 선언을 한 후 정계를 떠난 뒤 2008년 폐암으로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2010년 7월 26일 79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쿠데타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었던 걸로 알려졌다. 결국 이 책은 영영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장태완은 2010년 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난 국가와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국가가 맡겨준 수도경비사령관과 비상계엄하의 수도계엄사무소장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속죄를 비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라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가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012년 1월 17일 부인 이병호씨가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 10층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앓고 있던 우울증이 더 악화돼 치료를 받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태완은 <12.12쿠데타와 나>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2·12 사태로 인해 그동안 천직으로 알고 자부심을 느껴 온 군대를 떠났을 뿐 아니라, 그 충격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그야말로 감당키 어려운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결혼 이후 30여 년 동안 군인의 아내로서 남편을 성실하게 내조하면서 가정을 이끌어 오다가 뜻하지 않았던 12·12 사태로 인해 겪어야 했던 내 아내의 비극과 고통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컸던 것이다."

12.12 쿠데타는 충직했던 한 군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를 잔인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셈이다.

*참고 자료
<12.12 쿠데타와 나> 장태완, 명성출판사, 1993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 이원준·김준철,  책보세, 2012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정승화, 까치, 1987

#장태완#서울의봄#수도경비사령관#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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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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