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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로 출근길 풍경. 조만간 이 풍경 속 초록들은 알록달록으로 바뀔 것이다. 추석 선물 규모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백두대간로 출근길 풍경. 조만간 이 풍경 속 초록들은 알록달록으로 바뀔 것이다. 추석 선물 규모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 홍정희
 
"피곤해!", "너무 바빠!"를 입에 달고 퇴근해도 저녁 지어 먹고 나면 살랑이는 바람 맞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이는 짧은 시절이 있다. 바로 요즘. 사십 대 중반 부부와 유아 한 명 살고 있는 우리 집은 요즘 자주 "밤 산책 가자!" 소리를 한다. 어슬렁 걸으며 시시껄렁한 이야기 주고받고,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해도 요즘 이 바람엔 다 좋지!

남편은 추석이 가까워 오면 똑같은 이야기를, 특히나 밤 산책하며 자주 꺼낸다. 했던 얘기 또 해도 너그러워지는 계절인 줄 알고 꺼내는 전략인듯 싶지만 어쩐지 이 이야기는 나도 들을 때마다 온몸에 온기가 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남편 가족은 어느 추석 연휴에 아버지가 모는 트럭을 타고 밤거리에 나가 차 안에 앉은 채로 한적한 도로의 가로등을 구경했더란다.

이십 대 새댁이었을 어머니께서는 "불빛이 너무 예쁘다!"라며 경탄을 쏟아내셨다는 이야기까지 똑같이 듣는 레퍼토리지만 그 옛날 대단할 것도 없는 길거리 가로등 구경을 어린 자녀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만들어주셨던 소박하고 사람 좋은 젊은 시부모님 모습이 그려져 흐뭇하게 웃게 된다.

남편보다 좀 더 가난했던 나는 집에 차는 없고 아파 누워있는 아빠만 있었으므로 가족끼리 자동차 마실은 못 나갔지만 추석 즈음 달뜬 기분으로 골목을 달리던 추억이 있다. 딸 셋과 엄마까지 여자 넷의 생리대값도 버거웠다던 그 시절 엄마는 추석 즈음 있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생신은 꼬박 챙기셨다.

언제나 일하고 있는 엄마를 대신해 어린 내가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 한 근 끊어 신문지에 둘둘 말아 들고 20분 거리쯤 떨어져 있는 큰댁까지 열심히 달려가 "내일 큰아빠 생신이시라고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라고 해서요"라며 숫기 없는 목소리로 생신 축하드린다는 인사까지 건네면 임무 완료. 어린 마음에도 '이런 게 사람 도리구나'라는 감각을 느꼈던 듯하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네는 뿌듯함, 그 중요한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우쭐거림과 골목을 달리며 이마에 닿던 바람까지 선연히 기억하며, 지금 나는 또 새로운 추석 추억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백두대간로에 위치한 우리 학교. 비 온 뒤 풍경마저 추석 선물같다.
백두대간로에 위치한 우리 학교. 비 온 뒤 풍경마저 추석 선물같다. ⓒ 홍정희

영화나 소설에서나 봤을 법한 광경

사십 대 중반이 된 나는 강원도 두메에 있는 전교생 6명 중학교의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이곳의 도로명 주소는 무려 '백두대간로', 해발 810미터 구불구불 재를 넘어 들어간다. 우리 학교의 특별하고도 착한 아이들 이야기는 그간 <오마이뉴스>에 몇 번 소개했던 터, 이번에는 무려 새로 부임해 오신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관련기사]
전교생 4명 중학교, 교사가 호들갑 떠는 까닭(https://omn.kr/1ym16)
눈물겹도록 고맙다... 전교생 6명 중학생들이 사는 법(https://omn.kr/23lxj)

교장 선생님께서는 강원도에서 가장 큰 학교의 교감으로 근무하시다 이번에 교장으로 승진하여 강원도에서 가장 작은 우리 학교로 오시게 되었다. 승진 발령 받아 오신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우리 학교는 조금 이른 추석 선물을 매일 받고 있다.

9월 1일 자로 첫 출근하신 교장 선생님실 벽면이 꽃과 화분으로 가득 찬 광경을 보고 우리는 적잖이 놀랐다. 이곳은 꽃 배달이 되지 않는 곳인데 한꺼번에 많은 주문이 근처에서 들어오니 특별히 모아서 배송된 듯하다. "이렇게 많은 축하를 받는 분이시라면 어쩌면 좋은 분일지도?"라는 안도와 기대, 그럼에도 마음 놓지 말자는 경계의 마음이 혼재되어 우리 교직원들끼리는 쑥덕쑥덕했더랬다.

꽃과 화분은 서막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9월 1일부터 지금까지 한 달이 다 되도록 거의 매일 승진 축하 선물이 배송되고 있는데 그 종류도 다양하다. 떡이 가장 많지만 종류가 겹치지 않게 다양하게 꾸준히 들어오고, 유명 빵집의 빵이며 과일, 커피 원두와 음료, 견과류, 오늘은 급기야 교장 선생님 지인분이 직접 농사지으셨다는 파프리카 한 상자가 배송되었다(모두 김영란법이 허용하는 소액의 선물들이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매일 그 선물들을 교직원과 전교생에게 나누어 주신다. 덕분에 학생들은 매일 교장실에 가서 봉지 봉지 먹을 것을 받아온다. 교장실 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고 아이들은 매일 교장실에 들락거리는 광경, 어느 영화나 소설에서나 봤을 법한 드문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아이들 책상에는 그날그날 받은 주전부리들이 놓여있고, 어느 날 하굣길엔 똑같은 떡 상자 하나씩이 손에 들려 있고, 또 어느 날엔 포도 한 송이씩을 품에 안았다. 호들갑쟁이인 나는 이런 광경에 탄복해 그만 또 "너무 아름다워"라며 목소리 톤을 한껏 올린다.

교무실 동료 선생님들 아침·저녁 메뉴가 일치하는 날도 많다. 누군가가 오늘 아침 교장 선생님이 주신 떡 먹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저도요", "저돈데"라는 릴레이가 이어지고, 퇴근 시간이 되면 "(낮 동안 이것저것 먹어서) 배불러서 오늘 저녁엔 교장쌤이 주신 빵으로 때워야겠네요"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교문을 나선다. 방학 동안 운동 열심히 해서 살 빼놨는데 개학하고 살쪘다는 젊은 선생님 이야기에 다 같이 한바탕 웃기도 한다.
  
 평범한 날 오후, 오며 가며 주워먹고 있는 교무실 테이블 주전부리들. 전부 교장쌤께 받은 선물이다. 맛있는 커피 원두까지 들어와 매일 아침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신다.
평범한 날 오후, 오며 가며 주워먹고 있는 교무실 테이블 주전부리들. 전부 교장쌤께 받은 선물이다. 맛있는 커피 원두까지 들어와 매일 아침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신다. ⓒ 홍정희

한 달 가까이 매일 승진 축하 선물을 받으시는 교장 선생님은 어떤 인생을 사신 걸까? 배우고 싶고 닮고 싶어진다. 그 선물을 매번 나누어 주시는 교장 선생님의 마음이야 두말할 것 없이 감동이지만 교장 선생님께 선물 보내시는 분들 마음도 어렴풋이 가늠이 되어 참 귀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장 선생님 한 명 몫으로 보내셔도 축하의 마음 전달에 충분할 텐데 일부러 학교를 검색해 교직원과 학생 수를 확인하고 모두 나누어 먹을 만큼의 양으로 보내는 그 성의를 생각하면 좋은 사람 옆에 좋은 사람이라는 명제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추석을 앞두고 우리에게 줄 선물을 따로 준비하고 계시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9월 내내 매일 추석 선물을 받아오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또 기꺼이 기쁘게 받을 것이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말할 것이다. 존경하고 축하하는 마음, 그 마음을 또 나누는 마음. 이게 환대이고 같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우리 이렇게 아름답게 살자고.

내년 추석 즈음 우리 가족의 밤 산책 이야깃거리는 아마도 요즘의 이 일화가 되겠지. 9월 한 달 내내 추석 선물 받은 이야기.

덧붙이는 글 | 해당 기사는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한달째 추석 선물 받는 중#강원도 산골 중학교 교장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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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그리움을 얘기하는 국어 교사로,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로, 자연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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