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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진보에 대한 물음

"진보란 무엇인가?"

기본소득당 오준호 공동대표의 신간 <사명이 있는 나라>를 읽고 나는 이 오래된 질문이 떠올랐다. 2008년 퇴임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진보의 미래>라는 책을 구상하며 87년 체제 성립 이후 자신들의 세계관을 곧 진보주의라고 설파하던 진보정당운동을 향해 이 물음을 던졌다. 그에게 있어 진보란 한국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입어야 할 정체성이었는데, 그에 반해 진보정당운동의 세계관은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물음으로부터 약 10년 뒤인 2017년 촛불혁명이 진행되던 와중 철학자 김상봉도 <네가 나라다>라는 책을 통해 진보에 대한 물음을 이어갔다. 노무현의 물음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낙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김상봉의 물음은 자신이 속한 민주화 세대와 87년 체제가 더 이상 새로운 한국사회의 모습을 창조하지 못할 것 같다는 비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상봉에게 있어 보수정치란 자기를 보존하는 활동이고 진보정치는 새롭게 자신을 형성하는 활동이다. 그렇기에 진보주의자에게는 사회가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내용으로서의 이념과 그 이념을 개인의 차원에서 내면화한 사명이 필요하다. 현재의 진보정치에는 이념이 없기에 현실에 적합한 객관성이 부족했고 사명이 없는 탓에 전향이 속출했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진보정치에 이것들이 필요할 것이라는 일종의 세대적 유언을 남겼다.

여전히 노무현의 물음을 품고 사는 많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보다는 적지만 다음 세대를 향한 김상봉의 부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나는 <사명이 있는 나라>를 그 응답으로 제출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진보정치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명이 있는 나라>를 주목해달라고 요청한다.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정체성
 
"오늘날 우리 앞에 높인 거대한 사회경제적 도전에 맞서기 위해 국가가 '사명 지향 리더십'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내용이다."
 
개인으로서 우리의 시야는 근시안적일 수밖에 없다. 조선민족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독립운동이라는 장기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기후변화와 같은 거대한 위기가 찾아온 시대에는 그만큼의 거대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사명이 있는 나라
▲ 책 표지 사명이 있는 나라
ⓒ 미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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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호는 기후위기와 더불어 글보벌 안보위기, 불평등·양극화 위기를 우리시대의 문제로 진단하고 이러한 위기들은 도저히 개인의 시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사명이 있는 나라'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과거와 같은 불의한 방법을 앞세운 보수정치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 시대에 무슨 수로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냐는 반론에서 그는 모든 개인들을 향해 외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명이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의 결단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다음 그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돌격하며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향한 여정을 제시한다.
  
기술혁신이라는 지평

오준호는 한국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녹색전환을 꼽는다. 녹색전환에서 도태될 경우 RE100으로 대표되는 기후 무역 체제로 인해 당장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임박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녹색전환을 위한 10년 계획을 제안하고 온갖 국가의 사례들과 최신 기술혁신 동향을 분석해 이것들의 혁신적인 조합을 제시한다.

기술혁신이라는 진보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이 기획은 글로벌 안보위기 대응으로 이어진다. 그는 미중갈등의 최전선이 기술패권경쟁에 있다고 분석한 다음 미중 어느 쪽의 편에 가담해도 한국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전망을 검토한다. 여기까지는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여느 학자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이다. 그의 기획이 다른 점은 스스로의 힘을 이용해 환경을 바꾸겠다는 주체성에 있다.

그의 구상은 이렇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기술혁신을 선도하는 국가로 거듭나는 한편, 중견국과 개발도상국의 디지털화와 녹색전환을 지원해 외교적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중견국 연대를 강화해 미중 양극체제를 완화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결국 이 구상의 핵심은 한국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어서 국가적 장기과제연구를 주도할 기관 설립, 새로운 법 지원 체계 구축, 획기적인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을 주장한다. 그런 다음 그는 한국 진보가 그동안 맞서왔던 건전재정론과 감세정책을 향해 돌진한다.

기존의 구도가 복지확대 및 증세정책을 주장하는 진보정치와 건전재정론 및 감세정책을 설파하는 보수정치의 대결이었다면 그는 이제 기술혁신이라는 새로운 전선에서 보수정치의 전통적인 의제들을 공격하고 있다. 기술선도국가로의 전환은 국가와 인류공동체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에 마치 전쟁채권을 발행하듯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연결

하지만 이렇게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기술선도국가로의 전환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성공이지 개인의 성공이 아니지 않은가? 파멸을 막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초양극화 사회의 도래라면 그것은 가치 있는 생존인가? 이러한 의구심이 떠오를 때 그는 이제 기적과 같은 기획을 향해 달려간다.

알래스카에서는 유전으로 거두는 수입을 모든 주민들에게 배당하고 있다. 이처럼 어떤 사회적 자산에서 비롯된 부를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기금을 국부펀드라고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전체가 펀드를 소유하는 형태의 국민부펀드 정책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개념의 핵심은 자연환경이나 연금 등 사회적 자산으로 얻게된 부를 공익적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이 기획의 마지막에는 이러한 개념이 기술혁신을 위한 투자에 적용되어 국가적 단위에서의 기술혁신과 개인적 단위에서의 기본소득을 서로 연결하는 구상이 있다. 그리고 이 구상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담보하여 대규모 재정투자를 만들어냈으므로 마땅히 그 결실이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강력한 당위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 기획이 진정 기적과 같은 지점은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 기금의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석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치에서부터 오는 부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성과가 곧 나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으로 연결된다면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우리는 강력한 목표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사명이 있는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다.

결론: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 진보주의자

기존의 진보정치는 부의 재분배라는 지평을 향해 달려왔다. 노동조합, 시민단체, 진보정당은 그것을 위한 조직들이었다. 보수정치의 의제와 타협하면서도 사회복지의 확대를 시도했던 민주당의 정치도 그런 것이었다. 이와 달리 <사명이 있는 나라>에서 보여준 오준호의 기획은 이제 진보정치가 기술혁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갈 때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운동의 흐름은 이념을 강조하며 87년 체제 이후 성립된 그들의 세계관을 고수해왔다. 노무현은 그것이 진보주의의 전부일 수 있는지 물었고 김상봉은 그것이 사실은 이념이 아니기에 객관성이 없으며 진보주의자들에게 사명도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회와 개인이 연결되어 있듯 이념과 사명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를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 김상봉의 통찰이었다.

오준호의 기획은 애초부터 개인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명이 있는 나라는 마치 기본소득처럼 모든 구성원들에게 기본 목표의식 혹은 기본 꿈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그런 기획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는 기술혁신이라는 지평을 향해 달려가는 새로운 진보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스로 사명이 있는 국민이 되었다.

이것이 돈키호테의 기행으로 끝날지 모험의 시대를 연 위대한 항해로 기록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가 이 책에서 보여준 형태의 사명을 가지고 이 시대를 헤쳐나가는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진보정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기본소득당 당원입니다.


사명이 있는 나라 - 미래를 위한 세 가지 키워드 : 녹색전환, 혁신국가, 평생배당

오준호 (지은이), 미지북스(2023)


태그:#기본소득, #노무현,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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