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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이 디지털 사진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645N이라는 중형 포맷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흑백은 Ilford XP400, 컬러는 Kodak Ektar100 필름을 사용했습니다.[편집자말]
중앙아시아에 대해 처음 깊게 인식한 것은 대학교 시절이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기악곡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된, '보로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라는 곡을 통해서였다. 그전까지 주로 접했던 음악은 베토벤이나 멘델스존같은 북서부 유럽 클래식 음악이었다.

'솔파미레미도솔'로 시작하는 그 악곡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유럽 음악이 지닌 '꽉 찬 듯한 따뜻함'과는 다른, '공허함과 공존하는 따뜻함'이라는 생소한 느낌을 줬다. 전체적인 화성과 리듬이 주는 이국적인(북서부유럽과 비교해) 분위기가 그랬고, 특히 앙상한 듯 풍성한 잉글리시 호른의 음색도 한몫했다.

중앙아시아를 지구본에서 찾아봤다. 황토색과 녹색, 하얀색이 공존하는 땅덩이들이 보였다. 어디선가 들어는 봤지만 소상히 알지는 못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컴퓨터로 세계 곳곳을 볼 수 있게 됐고, 위성지도를 통해 사람이 살지 못할 것 같은 고원과 사막, 유목민이 거주하는 푸른 초원 등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종의 취미가 됐다.

경유지라고 하기엔 좀 더 머물 만한 곳, 알마티

'동네를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시각이 없다면 어떠한 장엄한 풍경도 소용이 없다'라는 개똥철학 아래, 성인이 된 후 20년 가까이 국내여행을 충실하게 해왔다. 그러면서도 중앙아시아나 캄차카반도 등 도무지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곳을 작은 화면으로 훔쳐보며 살았다.

좁은 땅덩이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여행가로서의 내공을 키우던 중 좋은 동행인을 만났다. 나와는 반대로 넓은 세상을 먼저 배우고 있던 사람이었다.

비행기표, 해외에서 필요한 준비물, 여행 커뮤니티를 통한 정보 탐색 등은 그를 통해 해결했고 현지에서의 적응이나 세부적인 여정을 순발력 있게 꾸리는 것은 주로 내가 맡게 됐다. 환상의 콤비라고나 할까. 그는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교통편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출발과 도착 시각뿐 아니라 비행기의 기종까지 고려해 낸 결론은 '알마티(카자흐스탄) 경유'였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키르기스스탄의 고원 탐방이었기에 알마티에서의 일정은 이동으로 인한 여독이 쌓이지 않을 정도로만 짧게 설정했다. 물론 부수적 목표 중 가장 상위에 설정한 샤슬릭(꼬치구이, 주로 양고기) 맛집 탐방을 위한 시간도 포함됐다. 참고로, 그곳에서의 양고기는 우리나라 가격의 1/4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그런데 알마티에 내리기 직전부터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라게 됐다. 한밤중 상공에서 내려다본 알마티는 격자 모양의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야경에서부터, 매우 크고 정돈된 곳이라는 예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막연히 얼마 전 다녀왔던 카트만두와 같은 도심을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한국에서 예약했던 호텔을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알마티는 대중교통이 잘 돼 있다. '얀덱스(YandexGo)'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면 택시는 물론이고 버스의 노선까지 확인할 수 있는데, 실시간으로 버스의 위치가 움직이는 아이콘으로 표시되기까지 한다. 특히 관광객들에게 참 좋은 수단이 되는데, 앱에서 목적지까지의 운임이 미리 설정되므로 바가지요금을 내게 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처음 당황했던 것은 외관으로는 일반 차량과 택시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급히 앱을 다시 보니 차종과 색깔, 고유번호 그리고 기사의 이름까지 제공돼 있었다. 전면 유리창을 보며 묵례를 했더니 젊은 기사분이 씩 웃으며 차에서 나왔다. 구겨져 있던 큰 몸뚱이를 운전석에서 끄집어내는 듯 보였다.

"즈드라쓰부이쩨!"
"살레멧시즈베."


동행인은 러시아 말로, 나는 카자흐스탄 말로 인사를 했다. 중앙아시아는 주로 두 개의 언어를 쓴다. 그 나라의 말과 함께 러시아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각 나라의 말은 비슷한 듯 달랐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는 위에 썼든, 카자흐스탄 말로 '살레멧시즈베'인데 키르기스에서는 '살라맛스즈브'라고 말한다.

두 나라에서 여행하는 내내 택시 기사들은 모두 친절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무섭게 생겼다가도 만화영화에서나 보았을 듯한 함박웃음을 금세 짓고서 대화를 시도한다.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대부분 알아보고, "까레아스키?"라는 질문을 한 후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단어를 읊기도 했다.

15분 정도를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지불한 금액은 2300탱게. 우리 돈으로 6500원 정도 되는 돈이다. 카자흐스탄의 물가가 생각보다 싸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중교통비는 저렴하다. 버스비는 인당 150탱게로 500원이 안 된다. 우직하고 친절한 기사는 몸집만 한 두 개의 배낭을 트렁크에서 꺼내어 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러시아 특수요원처럼 생긴 여인이 호텔 계단 위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며 작은 문을 가리켰다. 내가 앞장섰는데 호텔 문을 밀자 열리지 않았다. 당겨야만 하는 문이었다. 덕분에 멈칫했고, 내 배낭에 동행인이 코를 쪘다. 바로 옆에 한 모둠 앉아있던 중년의 현지인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우리도 덩달아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한국에서 미리 계산한 호텔 가격은 하룻밤에 4만9000원이었다. 당일 예약으로는 7만5000원 정도였는데, 4성급 정도의 무난한 호텔 가격은 8만~9만 원 정도 한다. 우리가 묵었던 곳은 시내 외곽이라 조금은 저렴했던 것인데 직전 해외 여행지가 네팔이어서였는지 체감되는 비용이 제법 비쌌다.

알마티가 최근 들어 관광산업이 발달했다는 것을 숙소의 형태로도 알 수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나 깔끔하게 관리되는 곳은 주로 게스트하우스나 캡슐 호텔이었다. 여행객이 저렴하게 머무르면서도 문화적인 만족 또한 할 수 있도록 꾸려지는 곳이었다.

알마티에서 머무르기로 한 것은 1박 2일이었다. 그런데 동행인의 몸상태가 좋지 않기도 했고, 이튿날 밝아 온 알마티의 풍경이 산뜻해 하루를 더 있기로 했다. 자유여행의 묘미이자 미리 정하지 않고 하는 느슨한 계획의 이점이기도 하다. 왕복의 비행기표와 첫날의 숙소만 미리 정해두고, 꼭 가야 할 곳에 대한 대략적인 날 수만 염두에 둬놓은 채 많은 부분을 현지에서 새로 계획한다.
 
알마티의 녹지사업 알마티에는 곳곳에 울창한 숲이 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 안사을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매우 건조한 곳이기에 고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곳은 사막 같은 황량한 도시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마티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의 어떠한 도시보다도 숲이 많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녹지 조성에 의해서라는 것이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수로에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이고, 약 8cm 정도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수로가 알마티에는 미로처럼 연결이 돼 있고 24시간 물이 흐른다. 게다가 온 도시에 스프링클러가 있어서 시간이 되면 저절로 나와 물을 뿌린다.

공원뿐 아니라 시가지에도 굵은 나무와 키가 작은 풀이 화단에 싱싱하게 살아있다. 위도가 높아 작열하는 태양이 오래 떠 있고, 건조한 공기가 호흡기를 메마르게 할 만도 한데 도시 전체가 하나의 숲처럼 만들어져 있어서 산책하기 참 좋았다. 아직은 노후화된 차들이 있어서 공기의 질이 매우 좋지는 않았지만, 전기 트램과 대중교통이 발달하여 앞으로 지속해서 나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 소련의 건물, 하이브리드 차량, 길 한복판에 고장난 차량을 손수 고치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곳 ⓒ 안사을
   
젠코프 대성당과 콕토베 유원지

알마티에 며칠 머물면서 갈 만한 곳을 꼽으라면 콜사이, 콕토베, 침블락, 센트럴파크, 대통령공원, 중앙박물관, 젠코프 대성당 정도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온전히 관광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은 한나절뿐이었고, 고원지대인 침블락은 키르기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기에 콕토베, 젠코브 대성당을 가보기로 했다. 중간에 질뇨르 바자르도 잠깐 들르기로 했다.

젠코프 대성당은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망이 있는 건축물이다. 세계 8대 목조건축에 꼽히며 두 번째로 높다. 리히터 진도10의 지진에도 견딘 목조건물로 유명하기도 하다. 판필로프 공원 한복판에 있는 이곳은 광대의 옷 같기도 하고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 팔레트 같기도 한 화려한 색감이 단연 돋보인다.
  
젠코프 대성당 현상액 수세가 잘 안 되었는지 얼룩덜룩하다. 다채로운 색감의 건물을 왜 흑백필름으로 찍었냐고 물으신다면? ⓒ 안사을
  
성당 내부 금빛 장식이 화려했다. ⓒ 안사을
 
여기까지 사진을 찍고 필름을 갈았다. 한 롤에 16장을 찍을 수 있는 120 규격의 필름이다. 오래전 찍던 필름이 그대로 카메라에 남아있었고 남은 6컷의 분량을 소진하고 필름실을 열었다. 성당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고 난 뒤였다.

"으악~!"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거 흑백이었잖아!"
"엥? 흑백필름이었다고?"
"어... 옛날에 넣어논 필름이라 까먹었어. 당연히 컬러필름인 줄 알았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성당 색감 죽인다고 감탄하면서 사진을 찍었다니..."


어떤 카메라는 필름실이 투명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 기종은 필름의 종류를 직접 표시해놓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ISO 감도는 설정돼 있으니, 400이라는 숫자를 보고 당연히 Portra400 필름(컬러)이 들어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Ilford 사의 XP400 필름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잠시 망연자실 하다가 순간 한바탕 웃고 털어냈다. 다음날 오전에 잠시 시간이 있으니 한 번 더 들러서 컬러필름으로 건물의 외관만 담기로 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종종 발생하는 소소한 사건 중 하나다. 다양한 일들이 있다. 가령 렌즈와 파인더의 화각이 서로 다른 RF 방식의 카메라를 쓰다 보면 나의 손가락이 떡하니 사진 한복판에 나와 있는 일이라든지...
 
젠코프 대성당(2) 다음날 아침, 컬러필름으로 다시 담은 젠코프 대성당 ⓒ 안사을
 
해가 기우는 느낌을 받으며 우리는 버스를 타고 콕토베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향했다. 해발 1100미터 전망대에서 서쪽을 바라보게 되는 곳이니 알마티 도시 너머로 저무는 태양과 석양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마음에 담았다. 그런데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제대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국보다 좀 더 북쪽이니 당연히 겨울과 조금 더 가까운 특성을 보일 것이고, 해가 더 짧을 것으로 예상을 한 것이다. 위도가 높을수록 더욱 낮이 길어지는 현상이 생기는 계절이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극지방의 백야현상이라는 개념은 탑재돼 있었으나 위도가 높은 지역의 일조량에 대해서는 응용해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동행인에게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겠노라 자신이 있게 말하고서 한참을 기다려도 해가 넘어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 7시가 넘어가는데도 해가 중천이었다. 이상한 마음에 일몰 시각을 찾아보았더니 글쎄 무려 8시 반이 넘어야 해가 진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카메라에 흑백필름이 들어있었음을 알았을 때보다 더 어안이 벙벙했다.
 
석양 대신 아련한 노을 대신 쨍한 태양을 찍었다. ⓒ 안사을
  
콕토베의 대관람차 조망이 좋을 것 같았지만 마치 에어프라이어 속의 식재료가 될 것 같은 느낌에 타지 않았다. ⓒ 안사을
  
알마티 TV타워와 천산산맥 한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에도 녹지 않는 눈이 있는 저곳 너머에 키르기스스탄이 있다. ⓒ 안사을
  
분수와 아이들 콕토베에서 내려오니 해가 한층 낮아져있었다. 한낮에 달궈진 대지를 식혀주는 분수 속에서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 안사을
 
해가 기니 하루 또한 길어서 좋았다. 한참을 놀고 숙소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니 어둠이 내렸다. 시계가 9시를 가리켰지만 이곳에는 늦은 시각까지 문을 연 식당도 많았다. 가장 맛집이라고 여행객들이 손꼽은 식당으로 가서 샤슬릭을 둘이서 4인분이나 먹어 치웠다.

푹 자고 일어나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로 넘어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처음 타보는 국경을 넘는 버스, 익숙하지 않은 타국의 터미널 등에 대해 두근거림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우리가 경험하게 될 '달리는 불구덩이 버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질뇨르 바자르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직전 들른 전통시장의 모습 ⓒ 안사을
 
* 땀이 뚝뚝 떨어지는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도착한 키르기스스탄, 송쿨 호수에서 3일간 펼쳐진 좌충우돌 야영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지난 7월 23일부터 8월 9일까지 이뤄졌습니다.

#여행#필름사진#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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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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