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당시 국가보훈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토를 동북아 및 동남아와 연결하는 시도는 1949년 4월 4일 나토가 창설된 지 얼마 뒤부터 본격화됐다. 195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 중간 기사는 미 국무부의 세계전략 논의를 소개하면서 "지난 10년간 여러 번 논의된 바 있는 하나의 계획은 동북아세아조약기구 설치안"이라고 말했다.
그런 뒤 미국의 아시아정책과 관련해 "아마도 가장 중요한 조치는 아세아 우방제국(諸國)을 방위조약으로 미국과 연결시키고 또한 NATO 및 바그닷드 조약, 리오조약제국과 연결시키는 일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언급된 아시아 우방국들의 연계 방안은 1955년 3월 3일자 <경향신문> '동남아동맹과 직결될 동북아동맹'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 기사는 니토(NEATO)로 약칭되는 동북아시아조약기구와 시토(SEATO)로 간칭되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함께 묶는 것이 미국의 아시아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니토·시토를 중동조약기구(바그다드조약기구), 미주상호원조조약(리우데자네이루조약) 체결국들과 더불어 나토와도 연결해 글로벌한 안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미국의 세계전략이었다. 한·일 및 아세안을 나토와 연결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세계전략은 이렇게 예전부터 추진된 미국의 오랜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때 추진된 것들 중에서, 미국의 의도를 충족시키며 지금까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나토뿐이다. 1955년에 발효된 동남아시아조약기구는 1977년에 해체됐고, 이라크에 본부를 둔 중동조약기구는 1958년 이라크 7·14혁명(왕정종식)으로 이라크가 탈퇴하면서 해체됐고, 미주상호원조조약은 중남미에서 좌파 정권들이 성행하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미국의 세계 전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토와 발음이 비슷한 니토, 즉 동북아시아조약기구는 아예 출범조차 하지 못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려던 미국의 구상이 동북아에서부터 뒤틀렸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동북아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니토를 결성해 나토와 연결하면, 동아시아 내부의 위험 요소인 일본 재무장보다 저 멀리 유럽의 안보 이슈가 동북아를 지배할 위험성이 있었다. 또 미국 동맹국 또는 미국 대리인으로 격상된 전범국 일본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의 재무장이 합리화될 수도 있었다. 이를 우려하는 동북아 여론이 미국의 구상을 저해한 핵심 요인이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고 친일파와 합력해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지만,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돕는 일에는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 국민들 속에 내재된 반일 감정에 불을 지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57년 7월 20일 자 <경향신문> 1면에 크게 보도된 기사가 있다. '일본은 전통적인 침략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승만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텔레비전 및 라디오 편집자들과 가진 그달 18일 자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었다.
기사에 나오는 '일(日)은 강국되는 날 대망, 공산국가만이 적이 아니다'라는 소제목은 이승만이 반일 여론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전에 침략자였으며 다시금 침략자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인접국에게 자기의 집과 가족을 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로 대일 경계심을 표시했다.
"북태평양방위동맹에 일본과 같이 가입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미국 언론인들의 질문에 대해 그는 "대공동맹은 좋은 것"이라면서도 이것이 일본 재무장에 악용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 또는 일개 국가의 지배욕에 대하여도 역시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함으로써 동북아동맹이 일본의 지배욕을 충족시킬 가능성을 경계했다.
그는 북태평양방위동맹을 주창한 미국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다. "동(同) 주창자들은 일본이 지난날 한국을 점령하였고 만주를 침략하였으며 중국을 정복하고자 기도하였으며, 또한 미국을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全) 동부 아세아를 유린하고자 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동북아시아조약기구 창설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 위 발언이 있기 전부터 별도의 대체물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1954년 6월 15일 한국·중화민국·필리핀·태국·베트남·오키나와·홍콩·마카오를 참여시켜 아시아반공연맹 창립대회를 연 일이 그것이다. 동아시아 반공 무대에서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아시아반공연맹의 한국 지부로 출범한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이 지금의 한국자유총연맹이다.
일본을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삼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에서 벗어났기에 아시아반공연맹은 흥행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반일 정서가 이승만을 움직이고 이것이 나토와 니토의 연결을 가로막은 데서 이 일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간과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