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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한 장면이다. "친일파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겠느냐"고 묻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에게 안옥윤(전지현 분)은 이렇게 말한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일제강점기 3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처음엔 일제에 저항했던 이들조차 시간이 흐르며 하나둘 변절하기 시작했다. 포기하면 편했다. 부역의 대가로 부귀영화가 보장됐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마다하고 만주로, 시베리아로, 상하이로 떠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삶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조선 제일의 갑부였던 이는 독립군 군자금으로 자신의 재산을 모두 헌납하고 굶어 죽었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독립군 사령관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뒤 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냈다. 상하이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와 체포를 피해 늘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이들이 부귀영화가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이유가 뭘까. 

그 답을 찾기 위해 2030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5월부터 6주에 걸쳐 진행된 서울 지역 독립운동 유적 및 박물관 답사 프로그램 <걸어서 역사속으로: 길 위에서 만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시작이었다.
 
 백범김구기념관 로비 앞에 선 <걸어서 역사속으로> 답사 멤버들
백범김구기념관 로비 앞에 선 <걸어서 역사속으로> 답사 멤버들 ⓒ 김경준
 
걸어서 역사속으로, 길 위에서 만나는 독립운동가들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된 건 2월 무렵의 일이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서울청년센터 관악오랑 측으로부터 "관심 있는 주제로 프로그램을 한 번 진행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평소 독립운동사 전공을 살려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 및 박물관 투어 등을 추진해보고픈 마음이 있었기에 바로 그러한 취지를 담아 프로그램 운영계획을 전달했다. 취지에 공감한 관악오랑 측에서 프로그램 개설에 동의하면서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프로그램의 공식 일정은 6회차로 짜여져 있었다. 6주 동안 답사할 장소를 정한 뒤 청년들의 참가신청을 받았다. 참가자들의 지원동기는 하나 같이 인상적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뮤지컬 <영웅>을 본 뒤 올해만큼은 일본 여행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청년, 평상시 역사 다큐멘터리 등을 즐겨 보면서 역사의 현장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청년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청년들이 참여를 희망했다.

특히 어린 시절 해외에서 자라다 성인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는 한 청년의 사연은 유독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다.

"15년 동안 재외국민이었을 때 정체성의 혼란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다잡았고, 자연스레 애국심을 키우게 됐다. 늘 마음 한 켠에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뭉클함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역사의 현장을 같이 밟으면 마음에 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잔잔한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올 귀한 경험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엄선한 8명의 청년들과 6주에 걸쳐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국립서울현충원·안중근의사기념관·식민지역사박물관·경교장·효창공원 등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좇아 떠났다.

참가자들의 지원 동기가 뜨거웠던 만큼, 그 기대와 열정에 부응하기 위해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준비와 진행에 임했다. 코스에 넣은 장소들은 내 입장에서는 익숙한 공간들이었지만, 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주 금요일만 되면 대학원 과제도 뒷전으로 하고 새벽까지 혼자 동선 짜고 대본도 써가며 답사 준비에만 몰두했다. 아무래도 박물관 가이드는 처음이고 말주변도 어눌하다 보니 그렇게 준비를 했어도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 조절도 쉽지 않았고 횡설수설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다들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들어주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전시 해설하는 모습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전시 해설하는 모습 ⓒ 김경준
 
현충원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6주 동안의 답사 코스 중 나에게도 청년들에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장소는 2주차에 떠난 '국립서울현충원'이었다. 현충원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곳이지만 무덤이라는 성격 때문에 청년들 입장에서 다가가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실제로 멤버들 중 현충원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현충원 구석구석을 거닐며 그곳에 잠든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의 삶을 톺아보았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이민화, 평남도청 투탄 의거·중앙청 할복 의거의 주인공 문일민, 안중근이 될 뻔했던 남자 우덕순, 임산부의 몸으로 의열투쟁에 참여한 안경신 등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국립서울현충원 문일민 지사 묘역 앞에 선 청년
국립서울현충원 문일민 지사 묘역 앞에 선 청년 ⓒ 김경준
 
감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년들을 이끌고 현충원에 안장된 가짜 독립운동가 및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묘역에 섰을 때의 일이다.

진짜 독립운동가를 몰아내고 현충원에 안장된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의 묘 앞에서 청년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간도특설대 출신 임충식의 묘역 앞에서 간도특설대의 이른바 삼광정책(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는 것)과 각종 만행을 열거하자 분노했다.

이응준·신태영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잠든 장군제2묘역에 서자 그 아래 임시정부 요인 묘역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묘역이 펼쳐졌다. 친일파의 군홧발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잠든 형국을 보면서 청년들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잠든 장군제2묘역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잠든 장군제2묘역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 김경준
 
3주차에 다녀온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청년들은 또 한 번 가슴 아픈 우리 한국근현대사의 그림자를 마주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동화주의'라는 명목 아래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한 각종 수탈과 억압, 차별의 실상을 확인한 것이다.

친일과 항일의 갈림길에서 변절자의 길을 걸어갔던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의 삶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목숨 건 항일투쟁에 나섰던 김경천, 김산의 삶을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좌절과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등 한국 사회의 친일 청산 시도를 살펴보면서 청년들은 친일 청산이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공감하기도 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를 관람 중인 청년들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를 관람 중인 청년들 ⓒ 김경준
 
청년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

6주에 걸쳐 진행됐던 답사는 효창원(효창공원) 참배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효창원을 마지막 답사지로 결정한 이유는 효창원에 안장된 김구,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 등 선열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효창원 백범 김구 주석 묘소를 참배하는 <걸어서 역사속으로> 멤버들
효창원 백범 김구 주석 묘소를 참배하는 <걸어서 역사속으로> 멤버들 ⓒ 김경준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나의 자극제가 될 것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을 통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어가기를 희망한다."

프로그램 기획 당시 내건 취지였다. 실제로 6주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만났다. 한편으로 일제에 부역하며 반민족행위에 앞장 선 친일파들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청년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공식 일정을 마친 후 담당 매니저로부터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매회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을 계기로 다른 유적지들을 따로 찾아갈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는 청년, <백범일지>를 구입해서 읽으며 김구 선생처럼 매일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는 청년 등 다들 각자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 하나 감동적인 후기였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구절을 공유하고 싶다.

"우리의 과거인 역사에서도 한민족의 의지와 다르게, 외세에 부딪힌 근현대사의 많은 모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온전한 나인 대한민국인으로 남기 위해 피를 흘린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듣는 나도 물려주신 이 땅에서 온전한 나로 현재를 살아가려 합니다."

다함께 임정로드 떠날 날을 고대하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던 나부터도 이 모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돌아볼 수 있었다. 또래 청년들과 함께 걸으며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답사 코스였던 백범김구기념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시실에 걸린 충칭 임시정부 청사 사진을 보며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이렇게 사진으로만 볼 게 아니라 정말 다같이 '임정로드'로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자 멤버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그중 한 명은 아예 "우리 여행계 하나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6주 동안의 답사를 통해 다들 독립투사로 거듭난 듯하다. 언젠가 다함께 상하이에서, 충칭에서 옷깃에 '광복군 배지' 하나씩 달고 인증샷 찍을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동상 앞에 선 청년들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동상 앞에 선 청년들 ⓒ 김경준

덧붙이는 글 | 한양대 사학과에서 한국근대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걸어서역사속으로#관악오랑#임정로드#독립운동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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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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