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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책은 한쪽 입장에 편중되지 않아야 하며 정책적 효과를 여러 사람이 함께 누려야 한다. 정책적 효과가 한 방향으로만 나타난다면 그 효과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 정책은 지속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쌀 정책을 둘러싸고 생산자인 농민의 입장과 소비자인 국민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을까? 생산비를 보전받고자 하는 농민과 좋은 먹을거리를 저렴하게 공급받고자 하는 국민이 모두 공감하는 쌀 정책과 제도는 무엇일까? 온 국민이 동의하는 쌀 정책은 없는 것일까?

정부는 쌀값 폭락의 원인으로 '쌀 수요량 감소와 초과생산'을 꼽지만, 정작 한국의 쌀 자급률은 100%에 미치지 못한다. 쌀 수입 개방이 시작된 1993년 이후 저율관세할당(TRQ) 1) *(하단 설명 참조)으로 들어오는 수입쌀의 점유율은 4%에서 시작해 12%까지 높아졌다. 반면 한국의 쌀 자급률은 계속 떨어져 최근 10년간 평균 96% 정도였고, 2022년에는 82%대에 그쳤다. 바로 이 수입쌀이 재고미를 증가시키고 쌀값을 떨어뜨리는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다.

식량 위기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는 지금, 식량자급률(사료 포함)이 20%에 불과한 한국은 안정적 쌀 생산과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쌀 생산을 지속하려면 쌀값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근본적·구조적 대책이 반드시 수립되어야 한다.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농민에겐 최저가격을

첫째, 농민들이 바라는 정책은 쌀 최저가격제(공정가격제) 도입이다. 최저가격의 기준은 농민들이 쌀 생산비2) *(하단 설명 참조)를 보전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만한 금액으로 잡는데, 현재는 쌀 한 가마(80㎏)에 24만 원을 요구하고 있다. 밥 한 공기(쌀 100g)에 300원 수준에 불과하다. 국민 1인당 1년 쌀 소비량이 60㎏이라 쳐도 쌀값은 1년에 18만 원이고 한 달에 1만 5000원 정도이다.

2022년 쌀값은 45년 만에 최대로 폭락했지만, 농민 입장에서는 생산비가 200평(약 661㎡)당 52만 9500원에서 67만 9750원으로 28.4%나 증가했다.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최저임금이 필요하듯이 쌀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는 쌀 최저가격이 필요하다. 쌀 최저가격제는 쌀농사의 지속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국회가 매년 생산자단체와 함께 쌀 최저가격을 마련하고, 쌀을 시장격리3) *(하단 설명 참조)하거나 공공비축미를 사들일 때 이를 가격 결정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식량 위기에 대비해 공공비축미의 성격을 재정립해야 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식량 권장 공공비축량은 '국민 두 달 분량'으로 한국의 경우 약 60만 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국은 식량자급률의 지표가 되는 여러 작물 중에서도 쌀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히 높다. 따라서 쌀 비축 물량은 100만 톤 이상 확보해야 한다.

셋째, '쌀 자급률 100%'를 법적으로 명시하고, 자급률을 올리기 위한 실천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동안은 쌀 자급률을 높이겠다고 계획을 세워놓고 실천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쌀 자급률은 해를 거듭할수록 하락하고 있다. 쌀 변동직불제4*(하단 출처 참조)의 목표가격이 정해져 있던 시기에도 쌀 자급률은 조금씩 하락했다. 쌀이 남아돈다면서 쌀재배 면적을 줄이고 부족해진 생산량을 수입쌀로 메꾼다면, 10년 뒤 쌀 자급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넷째, 일정량을 국가나 지자체, 공공단체가 매입하는 공공수급제를 통해서 쌀 30만 톤을 한 가마에 24만 원, 즉 최저가격 수준으로 매입해야 한다. 친환경 고품질 쌀을 계약재배하고 공공 급식에 사용해야 한다. 여러 농산물에도 공공수급제가 필요하지만, 주식인 쌀부터 공공수급제를 도입해 국가책임농정을 실현해야 한다.

다섯째, 쌀 재협상을 통해 저율관세할당을 폐기하거나 수입쌀을 해외원조 등에 활용해야 한다. 기후위기·전쟁위기로 오른 국제 곡물가를 반영하듯 2023년 저율관세할당 쌀의 수입 예산은 1220억 원으로 전년도보다 30% 정도 올랐다. 쌀협상은 해외 공급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식량주권을 지키는 방향에서 국내 자급률을 올리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섯째, 양곡관리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 농민들이 양곡관리법 전면 개정을 요구한 이유는 국가 책임을 강화하여 쌀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이를 통해 식량 위기를 극복할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수확기에 쌀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단경기5*(하단 출처 참조) 쌀 가격이 5% 이상 떨어지는 경우, 혹은 그렇게 떨어진다고 예상되는 경우 정부가 쌀을 시장에서 자동격리할 수 있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이 필요하다.

일곱째, 농지청을 신설하여 농지를 보전해야 한다. 농지가 투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농지는 국민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물적 토대이고, 먹을거리의 안정적 공급은 국가의 책무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인적·물적 자원 이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새로운 형태의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한국과 같은 식량 수입국은 이러한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 한국의 농지 상황에서는 식량 자급계획을 실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저렴한 수입쌀이 결국 밥상을 뒤엎을 수 있다

한해 한해 쌀 자급률이 떨어지는 지금의 상황을 보면 우리밀의 처지가 떠오른다. 시장에 맡겨놓은 우리밀은 꾸준히 수입밀에 밀려 자급률이 0.8%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밀 가격이 2~3배 폭등하자 라면·국수·빵의 가격도 모두 올랐고 그 부담은 국민에게 돌아갔다.

수입쌀을 사 먹는 게 당장은 저렴해 보여도 쌀 생산 기반이 붕괴하면 그로 인한 고통은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쌀농사 면적을 줄여서 밀·보리·콩·옥수수 등을 심는 것으로 자급률을 올리는 것은 농업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콩이나 밀 자급률은 올라가지만, 주식인 쌀의 자급률은 그만큼 하락할 것이다.

결국 농민에게 좋은 쌀 정책은 국민 모두에게 좋은 정책이다. 생산자인 농민이 지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소비자인 국민도 좋은 쌀을 안정적으로 먹을 수 있다. 농민들이 좋은 쌀 정책을 통해 지키려는 것은 농민들의 논이자 동시에 온 국민의 밥상이다. 그 둘은 결코 서로 다르지 않다. 농민과 국민을 이간질하는 나쁜 정치에 속지 말자.


1)  정부가 허용한 일정 물량에 대해서만 저율 관세를 부과하고,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이다.
2)  쌀 생산에 투여한 모든 비용, 농민의 자가투여 노동 비용을 포함한다.
3)  정부가 쌀을 매입해 시장에서 격리하는 조처
4)  쌀의 수확기 평균 가격이 목표가격에 미달하는 경우 쌀을 직접 경작한 농가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
5)  농산물의 공급량이 수요량보다 훨씬 적어지는 시기

덧붙이는 글 | 글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6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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