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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살찐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는 덕우도는 전남 완도군의 대표적인 자연산 전복 주산지이다. 주변으로 매물도, 솔섬, 갈쿠섬, 작은도(소 덕우도), 송구섬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몸섬(덕우도)을 호위하고 있다.    

섬이 많은 만큼 해녀가 일할 수 있는 어장이 넓고 해산물이 지천에 널려있다. 이곳에는 완도군에서 유일한 이경자·이경례 '의좋은 자매 해녀'가 살고 있다.

이들의 생활은 마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처럼 맞물려 있다. 자매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에 살면서 함께 물질을 다닌다. 

자매 해녀를 만나기로 몇 번을 약속하고 또 약속하였으나 생업에 바쁘다 보니 좀체 시간이 맞지 않았다. 어렵게 통화를 해 다음 날 완도에 나온다는 자매와 만났다. 

항만터미널에서 기다리는 동안 춘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조는 사이 배가 도착했고 자매는 사라져 버렸다. 배 도착시간이 지났는데? 항해 중에 고장 났나? 도착시간 30분이 지나 전화를 하니 이미 도착해 일을 보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약속을 잡고 장소에 도착하니 자매가 길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10여 년 전 자매를 본 적이 있어 얼굴을 쉽게 알아봤다.

"오매 만나기가 징하게 애럽구만요 잉"
"섬에 살면 다 그라제"


자매의 고향은 금일읍 동백리다. 외갓집이 덕우도여서 덕우도로 두 분 모두 시집을 왔다고 했다. 

"나는 신랑하고 나이 차이가 크게 나!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난디, 시집을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먼 친척이 중매를 섰어. 그란디 엄마가 외갓집이 있고 남자가 성실하니 결혼하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내 나이가 이팔청춘이 막 지난 열여덟 살이었어.

옛날에는 지금처럼 배가 좋지 않고 목선에다 지오(GO)엔진이 달린 형편 없는 배를 타고 시집을 왔어. 시댁에 오니 시부모님 계시지, 막내 시누이가 시집을 안 가고 있더라고. 신혼이고 뭐가 없이 애가 생기면서 뒤론 바쁘게 살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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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경자(66세, 사진 왼쪽) 해녀의 이야기다. 그녀는 해녀 일을 스물세 살 때 시작했다. 당시 마을 해녀가 6명, 제주 해녀가 10여 명이 있어 자연스럽게 물질을 배웠다.

″열 아홉 살 때 아들을 낳고 두 살 터울로 딸을 낳았어. 덕우도는 바닷일이 아니고는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물질을 배웠는디 재미가 쏠쏠하더라고.″ 

경자씨는 처음에는 제주 해녀들이 만들어 준 소중이를 입고 갓물질을 하다 고무 옷(슈트)을 입고 본격적으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소중이를 언제 버렸는지 모르는디 걍 놔둘 것을, 으째 버렸을까 후회스러울 때가 있어."

애들은 시어머니가 맡아서 키워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물질도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있었다고. 

″애들을 시어머니가 키워줬지만 그래도 시부모는 어렵잔애! 우리 어머니가 애들을 키워줬지만 어쩔 때는 징하게 까탈스럽게 했당께. 그래도 큰 시집살이는 안했어."
 

자매이자 이웃으로 평생을 같이하고 있는 동생에 대해 한마디를 부탁하자 경자씨는 "우리 동생? 생활력 강하고 세상에서 가장 착한 둘도 없는 동생이지요"라며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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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이경례(63세, 사진 오른쪽) 해녀는 '어떻게 언니와 한동네에 살면서 물질을 하게 됐는가'를 물으니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자매가 덕우도 노총각 둘을 구해줬어요. 언니도 형부와 나이 차이가 있지만 저도 열아홉 살 때 띠동갑 신랑을 언니 소개로 만나 바로 결혼했어요."

남편은 언니 옆집에서 살던 총각으로 순하디순한 순둥이였다. 경례씨는 물질을 결혼 후 스물세 살 때 배웠다.

"언니를 보니 물질을 배우고 싶더라고요. 수영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래서 배웠는데 남편이 어장을 시작하면서 같이 배를 탔어요. 문어통발, 고대구리, 주낙을 했는데 남편 건강이 나빠져 배를 팔고 다시 물질을 하게 됐어요."

덕우도 바다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다다.

"매물도나 솔섬에 가면 여러 가지 산호초가 살고 있어요. 물질할 때면 살쾡가 꾸욱~! 꾸욱~! 하고 소리를 내면서 주변을 맴돕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형 태풍이 여러 번 오면서 바닷속의 수산물이 많이 사라졌다.

″옛날에는 전복도 많고 홍합이 유명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홍합은 많이 사라져 일년에 한 두번 작업을 해요. 덕우도 홍합 꼬잽이(홍합을 까서 가느다란 막대에 끼워 3일정도 말려 찐 음식으로 잔치상이나 제사상에 놓는 음식)하면 유명했는데 지금은 꼬잽이가 사라졌습니다."

홍합 꼬잽이 이야기가 나오자 언니 경자씨가 거들었다.

"1970년대에는 금일읍과 덕우도간 배가 있었어요. 시집을 와서 금일 화전리 장에 홍합 꼬잽이를 팔러 갔어요. 친정이 동백리인데 아는 사람들이 장에 오잖아요. 행여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하고 창피하다고 얼굴도 들지 못하고 꼬잽이를 팔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창피할 일도 아니고 화전리 장에 몇 번 간 것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매들은 얼마 전 남편들을 먼저 보내고 이웃으로 더 애틋하게 살고 있다.

이경례 해녀는 ″시집 온 후 부터 지금까지 이웃으로 살고 있어요. 자매지간에 서로 의지도 되고 애들 키우기도 좋고, 맛있는 음식을 하면 서로 나눠 먹고 좋은 점이 너무 많았다"고 회상했다. 

언니에 대해서 한마디를 부탁하자 경례씨는 "우리 언니요? 진짜 효부, 효녀상을 받아야 해요. 결혼해선 시부모님을 모셨어요. 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계시는 엄마를 모시고 와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살았어요"라며 칭찬했다. 

아픈 곳은 없냐는 우문에 둘이서 동시현답이 돌아왔다.

"나이 묵으먼 쪼금씩은 다 아프제! 안 아프다면 섬사람이 아니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완도신문#이경례#이경자#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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