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락 부는 바람에 매향(梅香)이 실려오는 듯하다. 집 뒤 야트막한 산에도, 이웃집 마당에도, 공원 산책로에도 매화가 활짝 피었다. 좀더 특별한 매화를 만나러 산청에 갔다. 남사예담촌에 있는 원정매와 산천재에 있는 남명매, 그리고 단속사지 정당매를 산청 3매라 일컫는다.
또한 남사예담촌에는 집집마다 오래 세월을 지켜온 매화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하씨, 박씨, 이씨, 최씨, 정씨의 다섯 문중을 대표하는 각 매화나무는 남사예담촌을 대표하는 5매(梅)로 남사오매로 불리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남사마을은 여전히 고풍스럽고 따뜻했다. 나는 매향(梅香)을 좆아 오래된 돌담골목을 거닐며 만개한 최씨매, 정씨매, 원정매, 이씨매를 마주했다. 열려진 대문에 매화집이라고 써붙여둔 하씨고택에 들어서자 할아버지 한 분이 마당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계셨다. 조심스레 매화구경을 왔다고 하자 흔쾌히 그러라고 하시며 지금 한창 이쁘게 피는 중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고려조 원정공 하즙이 심은 것으로 원정매라는 이름은 그의 시호 원정에서 비롯됐다. 원정매는 홍매화로 수령 670여 년을 자랑했지만 원목은 지난 2007년에 고사하고 후계목이 뿌리에서 자라 매년 꽃을 피우고 있다. 비록 원목이 고사했다고는 하나 수령 670년의 위엄은 여전했다.
산천재로 가는 길에 정당매가 있는 단속사지에 들렀다. 신라 경덕왕때 세워진 절로 추정되는 단속사는 지금은 동, 서 양쪽에 두 기의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고려말 정당문학을 지낸 강회백이 소년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하며 심었다는 정당매도 활짝 피었다. 곁에는 매화를 심은 뜻을 기린 정당매각이 서있고 주위에 여기저기 매화나무가 많이 있다.
단속사지가 있는 마을 이름이 운리(雲里)이다. 이름하여 운리야매이다. 뜰안의 매화가 선비라면 들판의 야매는 민초이다. 선비는 홀로 꼿꼿하지만 민초는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간다. 지리산 웅석봉 줄기 아래에서 비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자라서인지 운리야매는 강인하다.
산천재에 도착했다. 입구에 서있는 노란 산수유나무가 온몸으로 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남명선생이 61세에 산천재를 짓고 직접 뜰에 심었다는 남명매는 볼 때마다 꼿꼿했던 선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당 건너편으로 보이는 웅장한 천왕봉
능선이 절경이다.
맞은편에 있는 남명기념관에 갔다. 선생의 모습이 동상으로 서있다. 곁에는 명종 10년(1555)에 단성현감을 사양하며 쓴 '단성현감사직소'를 한글로 번역하여 전문을 기록해놓았다. 한참 동안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현재를 사는 내가 읽어도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는 글이다. 그 시절, 이토록 강하게 정치현실을 비판하며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선생의 용기와 성품에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남명선생께서 지금 살아계신다면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실까. 정말 궁금해진다. 그리고 옛 선비들이 매화를 사군자의 처음으로 꼽으며 유난히 사랑했던 이유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산청매화는 지금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