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제정될 뻔 했던 미국 맥주 순수령. 'The Inspiring and Surprising History and Legacy of American Lager Beer' 논문에서 발췌.
Library of Congress
미국 양조업계에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이 법은 거센 저항에 부딪혀 결국 좌초됐고 보리 이외의 곡물이 들어간 밝고 가벼운 라거 스타일은 미국 맥주의 간판이 된다. 아메리칸 라거로 명명된 이 스타일은 20세기 초 영국 에일과 독일 필스너를 제치고 시장을 석권했다.
특히 독일 이민자들이 설립한 잉링, 앤하이저부시, 밀러, 쿠어스 같은 맥주 회사는 자신들의 맥주를 전 세계로 퍼트리며 옥수수와 쌀을 미국 맥주의 정체성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전까지 위스키에 익숙했던 젊은 미국은 20세기를 지나며 맥주를 사랑하는 국가로 변해있었다.
미국 맥주의 상징, 옥수수와 쌀
흔히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을 최초의 미국 이주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13년 전에 이미 버지니아에 도착한 영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황금이었다. 기대와 달리 황금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환경으로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원주민의 도움으로 담배 재배에 성공한 생존자들은 영국과의 거래를 통해 정착에 성공한다.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망명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칼뱅파의 분파인 청교도는 성공회를 정화시키려 했다. 목표에 실패한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를 원했고 지금의 보스턴 남쪽 지역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온 초기 식민지인들에게 미국 땅은 척박했다. 보리와 밀농사는 녹록지 않았다. 대신 옥수수가 풍부했고 키우기도 용이했다. 이런 미국 사람들에게 술의 재료로 옥수수를 넣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맥주보다 옥수수를 이용한 증류주가 더 인기를 끌었다. 가정에서 소량으로 양조를 하기도 했지만 맥주는 대부분 영국에서 수입됐다. 1783년 독립 후에도 미국인들에게 맥주는 영국 포터와 에일을 의미했다.
미국에 본격적으로 맥주 시대가 열린 건 독일 이민자 덕분이었다. 1840년대 이들이 가져온 어두운 색 라거 둥켈은 영국 에일을 밀어냈다. 과학에 기초한 양조 기술도 정착되기 시작했다. 맥주가 위스키를 앞선 것도 이때 즈음이었다. 1860년부터 미국 맥주 산업은 2차 산업의 붐과 함께 크게 성장했다. 미국 노동자들이 선호한 맥주는 갈증 해소에 좋은 밝은 색 라거였다. 그들에게 둥켈은 너무 무겁고 진했다.
미국 양조사들은 독일과 체코 필스너를 벤치마킹하며 옥수수와 쌀을 첨가했다. 옥수수와 쌀이 들어간 아메리칸 라거가 미국 환경과 문화에 더 적합하다는 연구도 잇달았다. 미국 양조학자들은 추운 유럽과 달리 날씨가 온화한 미국에는 무겁고 진한 올 몰트 맥주(all malt beer)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69년 '곡물, 특히 쌀을 첨가한 양조 방법'을 발표한 안톤 슈바르츠는 부가물 맥주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학자였다.
미국 맥주에는 6줄 보리가 사용된다는 것도 좋은 과학적 핑계가 됐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2줄 보리와 달리 6줄 보리는 단백질이 많아 맥주를 탁하게 했다. 미국 양조사들은 보리 맥아 대신 일정 비율의 옥수수나 쌀을 넣어야 더 밝고 투명한 라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주를 물처럼 단번에 마시는 미국인들의 음주 습관도 가벼운 맥주를 선호하게 했다. 미국인들이 향미보다 가벼운 목넘김을 좋아한다는 것을 포착한 양조사들은 맥주에 부가물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비용도 중요한 이유였다. 보리 맥아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옥수수나 쌀을 넣으면 전체적인 양조 비용도 낮출 수 있었다.
1890년 미국 맥주 순수령이 기각되자 미국에서는 부가물을 넣은 라거가 대세가 된다. 1912년 미국 맥주 시장에서 올 몰트 맥주의 점유율은 겨우 5%에 불과했다. 아메리칸 라거의 성장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유럽과 아시아로 진출한 아메리칸 라거는 영국과 독일이 쥐고 있던 기득권을 흔들었다. 그중 앤하이저부시의 버드와이저는 그 폭풍의 중심에 있는 맥주였다.
미국 맥주의 신화, 앤하이저부시
1857년 야망으로 가득 찬 18살의 독일 젊은이가 미국 세인트루이스로 건너온다. 그의 이름은 아돌푸스 부시, 양조 장비 세일즈를 하던 그가 새로운 기회를 잡은 건, 또 다른 독일 출신 사업가 에버하드 앤하이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양조장을 인수한 앤하이저는 업무 차 관계를 맺은 아돌푸스 부시를 눈여겨봤고, 1861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 후 경영에 참여시켰다.
1879년 회사 이름이 앤하이저부시로 바뀌며 부시는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1880년 앤하이저 사망 이후에는 단독 대표로 양조장을 운영하며 회사를 발전시켰다. 부시는 놀라운 개척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1864년 루이 파스퇴르가 고안한 저온 살균법과 병 맥주 대량 생산 시스템을 자신의 맥주에 과감히 적용했다. 1874년에는 얼음을 넣은 냉장 차도 운용하는 개척가다운 면모도 보였다. 다양한 경험과 기술이 들어간 앤하이저부시 맥주는 장거리 배송과 장기간 보관에도 흔들리지 않는 맛과 품질을 자랑했다. 1876년 앤하이저부시가 출시한 맥주가 바로 버드와이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