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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이어령 선생의 답이다. 집도, 자녀도, 책도,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gift)였다고.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 고 하셨다.

놀랍고 아름다운 이어령의 답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열림원

지난 2월 26일, 이어령 선생은 향년 89세에 지병으로 영면에 들었다. 김지수 기자이자 작가가 엮은 이어령 선생과의 대담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은 3월이면 자신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 책은 그때 출간하라고 당부하셨다.

자신이 돌아갈 때를 특정하고 그때까지 생의 마지막을 온전히 정리하며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최초로 죽음학을 연구했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조차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평정심을 잃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었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아무리 평생 지성인으로 살아오셨던 선생이라도 철창을 나와 자신에게 맹렬하게 덤벼드는 호랑이에게 의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항암 치료도, 치료약도 거부하며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오롯이 맞으셨다니 선생의 투명한 정신력이 경이롭다.

작가가 서문에 밝혔듯이 이 책은 궁극적으로 죽음 혹은 삶에 대해 묻는 질문들에 대한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어령 선생의 답이다.

책의 마지막 장이 가까워올수록 선생의 말씀을 더 들을 수 없음이 안타까워 나의 더딘 책 읽기가 더 더뎌졌음을 고백한다. 지면상 선생의 말씀을 다 옮길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많은 이들이 보석 같은 선생의 말씀을 직접 책으로 접하시길 바란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어.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지. 이것들을 합치면 빛이야. 엄청난 에너지지. 그런데 반물질보다 물질이 더 많으면? 빛이 되다 만 물질의 찌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우리야. 자네와 나지.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라네. 그런 우리가 반물질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빛이 되는 거야. (p.27)

우리가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라고, 적절한 분량의 반물질만 만난다면 모두가 '빛'이 된다니. 이제 빛이 되고 싶은 사람이 할 일은 정해졌다. 나를 빛으로 치환시켜 줄 반물질을 찾는 것. 그것이 자신의 꿈일지, 사랑하는 대상일지, 지향하는 삶의 목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물질을 찾기만 하면 우린 모두 빛이 되는 거다. 종국에 빛이 될 우리 모두에게 건투를 빈다.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브를 타고 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p.41)

생명의 에너지원인 미토콘드리아의 대부분을 모계 쪽에서 전달받는 통로로만 여겼던 '배꼽'을 선생은 세상과 나라는 존재의 연결통로로 해석하신다. 한때 타인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서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다는 절대적인 진실을 꼭 기억해야겠다.

이야깃거리가 있는 삶

오늘 하루도 아픔과 슬픔이 턱까지 차올라 밥 한 숟가락 떠 넘기기 어려웠을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잠시라도 평안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공의(公義)'가 아니라 '공감'이 먼저라는 선생의 말씀처럼 내 존재의 근원인 타인의 슬픔과 분노엔 반드시 이유가 있음에 공감하자.
 
어릴 때 야단맞을까 두려워 딴소리 안 하고, 고분고분 둥글둥글 살면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고 살게 돼. (p.97)
 
"선생님, 일상에서 생각하는 자로 깨어 있으려면, 어떤 연습을 해야 합니까?"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해야 하네. (p.105)

선생이 어릴 때의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단호히 내리시는 호통의 말씀 같다. 아직도 고분고분 둥글둥글 살려고만 하고 있냐고. 이제는 야단맞을까 두려울 것까진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진실 앞에 당당하지 못한 비겁자인 채로 하루를 산다. 진실을 위해 앞장서진 못하더라도 참과 거짓마저 혼동하지 않도록 오늘도 밝게 깨어 있어야겠다.

2학년 우리 반 아이 중 유난히 "왜 안돼요?"라고 잘 묻는 아이가 있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보다는 (수업 시간과 무관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제지되었을 때 주로 하는 질문이긴 하지만, 느낌이 온다. 30년쯤 후에 이 아이는 꼭 무엇인가 특별한 자신만의 일가를 이룰 거라는 느낌. 어린아이의 궁금증을 막으면 미래는 없다. 주눅 들지 않고 왜냐고, 또는 왜 안 되냐고 물어볼 수 있는 용기만 키워준다면 나머진 이루게 되어 있다.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동력을 가지도록 하게. 백 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p.108)

프랑스 소설가인 폴 부르제도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류의 역사란 오랜 억압과 관습으로 이어져 왔으므로 생각 없이 산다면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악의 평범성'을 자신도 모르게 답습할지 모른다.
내 삶의 동력이 내 생각에 기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생각 스위치 'ON'!
 
"럭셔리한 삶이 뭔가요?"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p.153)

반 백 살 정도 살면 좋은 점 하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가 쌓인다는 거다. 어르신들이 하시는 공통된 말씀은, "살아온 인생을 글로 쓴다면 두꺼운 소설책 몇 권"이지 않던가. 다만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반복된 지루한 이야기로 끝내지 않으려면 오늘도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써내려 가야 한다는 사실. 다른 사람이 가진 똑같은 모양의 행복을 좇지 말고 나만의 유니크한 이야기로 럭셔리한 삶을 누리길.

각자가 가진 유일함
 
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 줄 아나? '살아 있을 때 그 말을 해 줄걸.'이야. 그때 미안하다고 할 걸, 그때 고맙다고 할 걸...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 (p.286)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저 가만히 손 잡고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단단한 어깨를 가지고 있어 그들이 기대어 실컷 울 수 있도록 잠시 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의 미안함을, 오늘의 감사를 내일로 미루지 않아야겠다. 눈을 보고 이야기해 줘야겠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있는 것들의 힘이야. (p.294)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한 대사처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믿어야 한다. 언젠가는 나만의 반물질을 만나 빛이 되고 꽃을 피울 거라는 것을. 그 사이에 우리를 흔드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기 위한 우주의 격렬한 기운이라는 것을.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다 제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그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p.309)
 
10만 대 1의 엄청난 경쟁력 속에서 겨우 품어진 생명의 씨앗 하나.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귀하며 존엄하다. 어둠이 있을 때 가는 빛에라도 주위가 금세 환해지듯, 누군가 지금 빛나고 있다면 그를 밝히고 있는 다른 이들의 수고나 희생을 돌아보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신 이 시대 최고의 지성도 결국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고 하지 않던가.

각자의 몫으로 살아내고 서로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가며, 각자가 가진 유일함이 다양한 이야기가 되는 세상. 이것이 이어령 선생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됩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은이), 이어령, 열림원(2021)


#책리뷰#이어령#마지막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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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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