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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이와 함께 10월의 마지막 2주를 제주도에서 지냈다. 서울에서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는 8일 동안 체험학습 보고서를 내고 빠졌다. 집에 돌아와 다시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숙제를 하다 말고 "엄마, 좀 도와줘" 하면서 수학 학습지를 내밀었다.

학교에 못 나간 사이 수학 4단원 진도가 중간쯤 지나버려 잘 모르겠다며 좀 가르쳐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보는 원주율 구하는 문제에 기억을 더듬고, 교과서 설명을 다시 읽어 가면서 대답을 해 주었다.

며칠 지나자 아이가 먼저 "수학은 한 단원을 못 배우니까 다음을 모르겠어. 나 수학 학원 좀 보내줘. 수학 좀 배워야겠어, 엄마" 하고 말했다.

국영수 학원 한번 다니지 않은 아이
 
 동네 학원 전단지.
동네 학원 전단지. ⓒ 최은경
 
아이는 6학년이 되도록 국영수를 중심으로 하는 학원은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었다. 나 역시 보내려고 마음 먹지 않아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아이와 친한 친구가 수학 학원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 학교에 가면 그 친구에게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다음 날, 카페에서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학교 근처 보습학원에 보내고 있는 동네 언니를 만났다. 학원에 대한 정보를 좀 알고 있을까 싶어, 큰아이가 학원에 보내 달라고 했는데 무엇부터 알아봐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언니는 숙제가 많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나누어서 학원 이름을 알려 주었다. 아이 성향과 학원에 보내려는 목적을 생각하고 상담을 받아 보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때 다른 동네에서 국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지인이 카페로 들어왔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우리가 학원 얘기를 하는 걸 들은 그는 커피를 받아 가까운 의자에 앉아서 우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노선을 잘 정해야 해. 애가 공부 잘 했으면 좋겠어? 공부로 대학 보낼 거야?"

공부는 아이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나름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질문을 듣고 보니 아이가 대학은 갔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튀어 나왔다. 얼마 전에 본 직원 복지로 주 3일 근무제를 한다는 회사의 광고도 떠 올랐다.

큰아이가 그런 근무환경의 직장을 다니면 좋겠다고, 착취당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면서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노동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단번에 답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데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들어갈 수 있지. 그럼 수능 공부 시켜야겠네. 수능을 보려면 지금부터 무조건 국영수 학원에 보내야겠고."

'무조건'이란 말이 채 소화되기도 전에 지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학원 국어 한 과목에 기본이 40만 원. 수학하고 영어도 그 정도 할 걸? 그럼 국영수만 해도 한 달 학원비가 계산이 나오지? 근데 그건 딱 기본을 말하는 거고. 그것만 해서 경쟁력이 없어. 그러니까 수능 점수는 무조건 부모 재력 순이야."

120만 원 X 12개월 X 6년...... 머릿속으로 계산을 여러 번 했지만 늘어나는 0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휴대폰을 켜 계산기로 확인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86,400,000원. 우리 가정은 아이가 셋. 그러면 이 세 배의 돈이 학원비로 든다는 건가.

모아둔 돈에 생활비를 줄이고 줄여서 첫째 아이는 어떻게든 보낸다 쳐도, 세 살 아래 둘째 아이까지 6학년이 되어서 국영수 학원에 보내 달라고 하면, 그때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두 아이 국영수 학원비만 240만 원에 이미 배우고 있는 유도와 태권도가 30만 원, 거기에 막내 유치원비까지 더해지면 매달 300만 원 가량이 필요하다. 외벌이 가정인 우리 집 사정으론 지출할 수 없는 돈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낙담하는 내게 지인은, 다양한 대입전형이 있으니 꼭 학원을 보내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길이 많다는 걸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에 만나 다시 얘기하자고 했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걸까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매달 20만 원씩 저축했다. 6학년이 되도록 특별히 쓸 일이 없어서 만 12년, 꼬박 144개월 동안 2880만 원 정도가 쌓였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매달 20만 원씩 저축했다. 6학년이 되도록 특별히 쓸 일이 없어서 만 12년, 꼬박 144개월 동안 2880만 원 정도가 쌓였다. ⓒ 최은경
집에 왔더니, 큰아이가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갔다가 발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봄에 세일할 때 한 치수 큰 걸로 사 두었는데, 그 새 더 자랐나 보다. 둘째 아이는 여름 동안 키가 훌쩍 자라서 봄에 입던 옷이 전부 작아졌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왔는데 배가 고프다고 냉장고를 뒤진다. 아이들은 학원만 다니는 게 아니라, 먹기도 해야 하고 입기도 해야 하는데, 사교육비에만 매달 300만 원이라니.

아이들이 자라면서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돈 때문에 못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매달 20만 원씩 저축했다. 6학년이 되도록 특별히 쓸 일이 없어서 만 12년, 꼬박 144개월 동안 2880만 원 정도가 쌓였다.

그 외에 나라에서 받았던 양육수당과 어른들로부터 받은 세뱃돈과 용돈들을 모은 800만 원 정도가 통장에 그대로 있다. 둘째 몫도 따로 모은다. 하지만 지인의 말대로 아이를 공부를 시키기로 하고 국영수 학원에 2년 반만 보내면 끝이라는 계산이 서자, 내가 너무 세상 물정 모르고 속 편하게 손 놓고 있었나 싶어졌다.

간식을 먹는 큰아이 앞에 앉아, 친구 학원이 어딘지 물어보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책에 눈을 둔 채, 다시 생각해 보니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아이에게 부끄러워졌다. 혹시 내 한숨이 아이에게 들렸을까? 집에 들어올 때 어두웠던 표정을 읽은 걸까?

아이가 공부에 특별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돈이 많지도 않으면서 자식을 셋이나 낳는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도 못 얻고 재능이 묻히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죄스럽기도 하다. 통장에 돈을 모으면서, 이것으로 부모로서 책임을 다 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학원은 본인이 다니고 싶어 할 때까지 기다려 준 거고, 대신 그 돈을 다 모아 두었으니 언제라도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큰소리 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서 좀 씁쓸해졌다.

아무튼, 아이가 셋인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에 대한 책임의 다른 말이 경제력이라는 현실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아기였을 때부터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사교육의 혜택이 다르고, 그 사교육을 조장하는 '좋은 대학'이라는 말이 문제이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회구조가 기괴하다고 믿었다.

"숲은 비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숲은 날로 깊어가는 법을 압니다. 굳이 날갯짓을 배우지 않아도 새가 스스로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를 수 있듯이 자연의 모든 생명은 이미 그 안에 스스로 자라고 익어가는 법을 품고 있습니다."

<숲에게 길을 묻다>(180쪽) 같은 책 속 구절을 필사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버텼지만, 코앞에 닥친 것 같은 아이의 미래에, 나는 쉬이 불안해지고 만다.

#수능#사교육비#학원#숲에게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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