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존엄을 소중하게 여기고 보호해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희생양이 된 것도 모자라 죽을 때까지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한 여성이 있다. 무능하고 힘없는 국가, 낡은 편견과 이념에 매몰된 기득권 사회가 한 인간의 삶과 인권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8월 24일 방송된 tvN STORY 오리지널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18회에서는 '조선의 공주는 왜 오랑캐의 아내가 되었나'라는 주제하에, 국가로부터 두 번이나 버림받은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했던 의순공주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경기도 의정부시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주택가 뒤편 산기슭에는 '족두리 무덤'으로 알려진 봉분이 위치해 있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온 흔적이 느껴지는 쓸쓸한 무덤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바로 조선의 왕족 의순공주(義順公主, 본명 이애숙)였다.
 
그녀는 생전 '오랑캐의 아내가 된 조선의 공주'라는 안타까운 수식어를 가진 채 살아야 했다. 공주는 왜 쓸쓸하게 역사속으로 사라져야 했으며 그녀의 무덤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1650년 효종(조선 17대 국왕)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나라의 실세였던 섭정왕 도르곤은 어린 조카 순치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르곤은 조선에 비밀 칙서를 보내 조선의 여인과 결혼하겠으니 신붓감으로 왕의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한다. 정복한 국가에서 군주의 딸을 비로 데려오는 것은 청나라의 풍습으로 '천하를 지배한다'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조선은 청나라에 의하여 정묘-병자,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청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특히 병자호란때는 효종의 아버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며 청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효종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끌려가 볼모생활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전쟁은 패했지만 지배층은 물론 민간백성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청을 오랑캐로 멸시하던 것이 조선 사회의 내부 분위기였다. 하물며 '북벌론'까지 거론할만큼 청을 적대했던 효종에게 있어서 원수의 국가에 자신의 딸을 보내고 사돈을 맺게 된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다.
 
1650년 당시 효종은 일찍 사망한 숙신공주를 제외하고 6명의 딸이 있었다. 이중 15세인 숙안공주는 이미 혼인한 상태였고 나머지는 모두 11세 이하의 아직 어린 나이였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도르곤은 왕의 누이나 딸 외에도 왕의 근족이나 대신의 딸중에서 참하고 덕행있는 자를 선택하여 답하도록 요구했다. 효종은 일단 자신의 딸을 꼭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한숨을 돌렸지만, 종친이나 대신들 역시 딸을 청으로 보내려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조선의 소극적인 대응에 분노한 청나라 사신의 압박에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며 조정은 쩔쩔맸다.

효종의 꼼수
 
  tvN STORY 오리지널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tvN STORY 오리지널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STORY

 
효종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대안은 왕족인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들이는 꼼수였다. 이개윤은 9대왕 성종의 4세손이자 효종의 9촌 친척이었고, 그의 딸 이애숙은 당시 16세였다. 효종실록에는 "금림군이 스스로 말하기를 딸이 있는데 자색(여자의 고운 얼굴이나 모습)이 있다고 하였으니 선택에 적절할 듯 합니다"라면서 이개윤이 직접 후보에 자원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어진 효종의 답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내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이개윤의 딸을 궁으로 들여오라고 했다"라는 것. 이개윤이 본인의 의지로 딸을 추천한 것이 아니라 효종이 이미 그녀를 점찍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했던 효종은 "딸을 숨기는 자는 엄히 처벌하겠다"라고 신하들을 협박하여 이개윤과 종친들의 딸 16명, 관리들의 딸 4명을 더하여 총 20명의 신붓감 후보를 꾸린다.
 
청의 사신은 여인들을 확인한 뒤 이개윤의 딸 이애숙을 도르곤의 신붓감으로 선택한다. 효종은 족보상으로 따지면 자신의 10촌고모에 해당하는 이애숙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라는 작호를 하사한다. 청의 실권자인 도르곤과 혼인 관계를 맺으려면 격에 걸맞은 지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의순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는, 옳을 의(義)에 순응할 순(順), '나라를 위한 옳은 일에 순순히 따랐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과 청의 국가적 관계가 걸린 일이었기에 의순공주는 마음대로 거부할 수도 자결할 수도 없엇다.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해야 했던 의순공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당시 도성의 많은 백성들은 청으로 떠나는 의순공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안했던 효종은 의순공주의 친정인 이개윤 집안에게 높은 관직과 재산을 하사했다.

조선의 한양에서 청의 수도 북경까지는 당시 두 달이 걸리는 고행길이었다. 고국을 떠나는 의순공주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청나라 사신단의 통역관이었다. 청나라 사람이 아닌 조선인이었던 그의 정체는 정명수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배신하고 청에 협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인물이었다. 조선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정명수는 청의 사신단이 조선에 올 때마다 통역관으로 동행했는데 그 횡포가 오히려 청인들을 능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조실록에는 정명수와 청 사신이 조선의 고을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의 기녀들을 바칠 것을 요구했는데,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명수는 의순공주를 데리고 청으로 돌아가면서도 그녀의 눈앞에서 조선 백성들을 수탈하며 각종 만행을 일삼았다.
 
어리지만 당찬 의순공주는 이런 정명수의 만행을 두고보지 않았다. 무오연행록에 따르면 의순공주는 "내가 들어가서 섭정왕께 아뢰면 네 목숨이 끊어질 것이니 네가 감히 마음속으로나마 내 나라에서 그러 악행을 하겠느냐"라고 일침을 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황한 정명수는 의순공주에게 사죄하며 감히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 못했다고.

도르곤은 의순공주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연산관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보고 하얀 매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백송골'이라는 청나라식 이름을 지어주며 만족해 했다. 16세의 의순공주는 23살 연상이었던 도르곤의 5번째 아내가 되어 청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4개월뒤 청나라는 또다시 사신을 조선으로 보낸다.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그 시녀가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힐책했다는 것. 도르곤의 진짜 속내는 또다른 조선 미녀를 뽑아서 보내라는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당시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정책을 눈치챈 도르곤의 의심도 한 몫 했다. 
 
효종은 어쩔 수 없이 청에 보낼 여인을 뽑아오라는 명을 내린다. 효종실록에는 "딸을 둔 집에서는 마치 병화를 피하듯 달아나 숨고, 심지어는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가 있어 원망과 탄식이 길에 가득합니다"라고 당시의 참상을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 이 사태를 바라보는 군주인 효종의 인식은 더욱 가관인데 비변사실록에 따르면 "한낱 여자를 희생시켜 국난을 풀 수 있다면 사양할 바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고 한다. 의순공주에 이어 또다시 여인들의 희생으로 나라를 지켜야했던 당시 가부장제 유교국가 조선의 초라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청에 끌려가던 여인들이 돌연 도중에 귀국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도르곤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연 급사했던 것. 도르곤의 죽음으로 여인들은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위기에 처한 것은 7개월 만에 남편을 잃게 된 의순공주였다. 도르곤이 사후 역적 취급을 받게 되며 의순공주 역시 역적의 아내로 몰리게 된 것.
 
청은 도르곤의 재산을 몰수했고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부하였지만 청의 새로운 실세가 된 보로에게 보내진다. 심지어 당시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조선의 사대부 여인이었던 의순공주에게는 견디기 힘든 참혹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모국인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의순공주의 딱한 사정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녀가 청의 또다른 실세에게 재가했다는 소식에 의순공주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외교적 이득을 노리는 데만 골몰했다. 하지만 보로마저도 얼마 후 또다시 사망한다. 연이어 두 남편을 잃은 의순공주는 타국에서 의지할 사람없이 쓸쓸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의순공주 이전에 조선에서 끌려간 여인들이 있었다. 청의 강압과 약탈에 의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은 타지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중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환향녀(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라고 불렸다고 한다.

배척받은 환황녀
 
환향녀는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인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환향녀가 등장하기 이전인 17세기부터 이미 '화냥'이라는 단어가 기록에서 발견된다.
 
다만 환향녀들이 조선 사회에서 배척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모진 고생을 겪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여인들은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오히려 정절을 잃었다며 냉대를 받고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사대부 가문들은 돌아온 여인들이 가문의 영예를 떨어뜨린다고 두려워하며 멸시했다.
 
의순공주도 조선으로 돌아왔다. 의순공주의 아버지 이개윤이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청국을 방문하여 딸의 귀환을 간곡히 요청했고 청 황제는 이를 수락했다. 청의 입장에서도 이미 정치적인 의미를 잃은 의순공주를 굳이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의순공주가 맞이한 현실은 다른 환향녀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개윤이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딸을 데리고 돌아오니 침을 뱉고 욕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조정에서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멋대로 딸을 데려온 죄를 물어 이개윤을 탄핵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삭탈관직을 당한 이개윤은 나라와 조정으로부터 버림받고 도성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사실 이런 비극이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능력하고 부패한 조선 그 자체였고, 그 책임자는 위선적인 군주 효종과 사대부 대신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모두 이개윤과 의순공주의 잘못으로 전가한 것이다.

의순공주는 조선에 돌아온 지 7년만인 1662년 8월 6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한 여인의 몸으로 조국을 위하여 강제로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갖은 고생을 하다가 고국에 겨우 돌아온 이후에도 오명으로 손가락질만 받다가 쓸쓸히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의순공주는 사후에도 씁쓸한 후일담을 남겼다. 의순공주의 무덤이 족두리 무덤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의순공주가 오랑캐와 사느니 강에 뛰어들었고 시신을 찾지 못하여 족두리만 남겨서 무덤에 만들었다는 거짓 이야기를 지어낸 것. 의순공주를 실제 사실과 다르게 꾸며내어 '정절을 지킨 여성'으로 포장하고 전설로 미화한 이면에는, 바로 '여인이 살아 돌아온 것이 죄'라는 잔인한 이중잣대가 녹아있는 것이다.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 지배층 남성들의 무능함과 치욕을 숨기고 싶었던 흔적들이 오늘날 의순공주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와 이념은 존재 가치가 없다. 의순공주와 환향녀들의 안타까운 역사를 통하여 돌아봐야 할 진정한 교훈이다.
벌거벗은한국사 의순공주 환향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