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달만이 삶의 목적이 됐을 때 메달을 딸 수 없는 삶은 무의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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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와 함께 토론토 대회에 간 호프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피 코치가 보낸 편지는 사실 호프의 아빠가 쓴 것이며 50만 달러 유산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 네가 쌓은 담을 허물어야 했어.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겠구나. 전혀 미안하지 않아. 넌 코치 일에 재능이 있어."
배신감에 절망하던 호프는 그럼에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로 한다. 이때 연출이 인상적이다. 마루에서 멋진 연기를 펼치는 매기를 배경처럼 지켜보고 있는 호프. 매기의 연기가 끝나자 호프 뒤에 있던 관중들은 열광한다. 호프는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닌 표정을 짓는다.
이어 점수가 발표되고 매기는 금메달을 딴다. 모든 관심은 즉시 매기에게 쏠리고 누구도 호프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호프는 쓸쓸한 모습으로 경기장을 떠난다. 애머스트의 수식어는 '금메달리스트 매기의 고향'으로 바뀐다.
호프는 그제야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이제 주인공은 매기이며, 자신은 선수가 아니라 코치라는 것을. 호프는 코치로서의 인생 2막을 시작하며 밴을 도와 체육관을 살리기로 한다.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로 호프는 밴에게 말한다.
"나처럼 메달을 딴 사람은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하지만 너랑 함께 한 순간들은 항상 메달을 땄을 때보다 좋았어. "
너무 일찍 최고의 순간을 맛본 호프에게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메달만이 삶의 목적이 됐을 때 메달을 딸 수 없는 삶은 무의미해진다.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는 그녀만의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현실을 인정하고 초라함을 받아들였을 때 호프는 비로소 17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기로 했을 때 호프는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은 메달보다 훨씬 크다는 것도.
호프가 국민 영웅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했던 것처럼 내게도 남들에게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망이 있었다. 자기 소개하는 게 늘 힘들었던 이유다. 하지만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의 자기 소개에 관심이 없으며, 과거의 이름에 얽매여서는 현재를 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삶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내 삶을 믿기 위해서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내가 어느 회사를 다녔는데' 자랑하는 사람, 빛나는 시절은 모두 과거 시제인 사람, 현재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미래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사람. 호프도,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살아갈 날이 새털같이 많다.
호프는 밴과 함께 체조 교실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아이를 가르친다. 그 아이들 중 누구도 올림픽은커녕 국가 선수권 대회도 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호프는 지금을 살아간다. 지금의 호프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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