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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2010년 6월 25일 서울고등법원은 과거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오주석씨 등 4명이 신청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주로 사업가들이었던 오주석 등은 1980년대 초 일본 등지를 오가며 사업관련 활동이나 연수를 받았는데, 이들이 연수 중 만났던 재일교포들 중 일부에 북한과 연계된 간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재심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오씨 등이 불법으로 연행된 뒤 안기부와 검찰에서 오랜 기간 구금당한 채 가혹행위를 통해 자백한 내용은 증거로서 인정될 수 없다"고 밝혔다.  
 
 2010.6. 25. YTN 뉴스
2010.6. 25. YTN 뉴스 ⓒ YTN
 
이 사건이 시작된 1983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해 5월 말 조선, 경향 등 1면에 "간첩 2개망 8명 검거"라는 기사가 실렸다. 간첩 혐의를 받는 이들은 경제인으로서 일본 등지를 오가며 일본의 공작원에게 한국의 경제상황, 항만시설, 군사시설 등을 꾸준히 탐지하여 보고해 왔다는 내용이다. 
 
 1983. 5. 26 경향신문 1면. 2개의 간첩망을 일망타진했다는 안기부수사발표가 있었다.
1983. 5. 26 경향신문 1면. 2개의 간첩망을 일망타진했다는 안기부수사발표가 있었다. ⓒ 경향신문
 
<제주 자유항 개방 노려 기지화기도>
오주석 6.25때 민청에 가입, 부역한 사실이 있는 오는 춘천지역 유지로 행세하면서 80년 5월 중순 일본 유통업체 시찰단으로 도일한 기회를 이용, 북괴공작원인 안-김 부부와 접선했다. 오는 안에게 춘천지역 군부대 주둔 현황, 국내 병기 생산실태, 동해안 군사경비 시설 등 자신이 알고 있는 국가기밀을 제보했으며, 80년 5월 25일 귀국 후 서울 ~ 춘천간 검문소 위치 및 검문실태, 육군OO부대위치, 춘천 지역 군납업자들의 군납실태 등을 수집하여 안에게 보고
- 1983. 5. 27. 조선일보 3면
 
 1983. 5. 27 조선일보 3면.
1983. 5. 27 조선일보 3면. ⓒ 조선일보
 
오주석 등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던 피해자들은 일본에 친척이 있거나 연수교육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사람들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재심재판 과정에서의 조사결과, 재일교포 공작원이었다는 재일교포들은 조선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정도였으며, 공작원이나 지도원이라는 증거는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탐지수집했다는 내용들은 모두 동창회 모임, 항만 시설, 공항, 도로의 검문소 등 일상에서 듣고 보게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한 엄청난 조직을 가진 간첩망의 조직원들이라며, 해외를 통해 숙련된 공작활동을 펼치던 매우 위협적인 간첩으로 묘사했다.
 
<공산주의와 간첩>
 (상략) 이번에 검거된 간첩들의 특징은 중소기업 종사자들의 해외여행을 파고든 것으로서 역시 해외여행 자유화와 모국 방문문호개방을 북한이 악용한 것이다. 우리는 올 들어서만도 지난 3월에 이어 또다시 5월에 2개 망의 간첩이 검거된 데서 솟구치는 긴장감마저 금할 수가 없다. 대남적화 책동의 수단으로서 북한이 소련 못지않게 첩자행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기관이 가차 없이 색출해내고 모든 국민이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다면 북한 간첩은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다고 믿는다.
- 1983. 5. 27 동아일보 3면
 
 1983. 5. 27 동아일보 3면
1983. 5. 27 동아일보 3면 ⓒ 동아일보
 
오주석씨 등이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중소기업과 해외사업 종사자들에게 마치 북한의 간첩활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한 논설을 펴기도 했다. 특히 한국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해외의 첩보 사례를 들며 한국의 대북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조장하는 사례로 오주석씨가 거론되었다. 

이들 피해자들이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에 대해 주장했음에도 법원은 외면했고, 언론은 침묵했다. 
 
복역 중에 송OO를 알게 되었는데, 수사기관에서 맞아서 몸이 안좋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모든 거동을 할 수 없었으며 그가 대소변 보러 가는 것도 못보았다.
- 진실화해위원회 오주석 간첩조작의혹사건 결정문 중 일부

모진 고문으로 인해 범죄사실은 조작되었고, 조작된 범죄사실로 인해 피해자들은 수년간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지만 교도소 생활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언론과 신문에서 이들을 간첩으로 덧칠한 탓에 사건 이전의 일상은 더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출소하고 나니 모든 게 달라져 있더라고요. 내가 간첩이라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나버리니 친구들도 멀리하더라고요. 
- 2017년 '지금여기에' 인터뷰 중

오주석 등의 범죄사실은 국가권력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오주석씨의 간첩 혐의가 안기부의 협박과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결론냈다. 국가가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하라는 권고 결정도 함께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을 수사했던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검찰은 오주석씨와 당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재심 역시 국가가 아닌 개인의 신청에 의해 이뤄졌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법원 역시 과거 잘못된 재판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명예회복과 관련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볕이 잘드는 자택에서 필자와 이야기 중인 오주석씨
볕이 잘드는 자택에서 필자와 이야기 중인 오주석씨 ⓒ 변상철

2017년 4월 서울시 시민청 지하에서 오주석은 '벽촌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함께 복역했던 양심수 동지들과 함께 감옥에서부터 써내려갔던 서예작품 전시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에서 오씨는 "지금까지 많은 조작간첩들 피해자들이 무죄를 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회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이지만 여전히 범죄자, 전과자로 살고 있습니다. 판결문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며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답답한 심경을 밝혔다.

고문을 가했던 가해자의 사과, 화해뿐만 아니라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파괴된 누군가의 일상에 책임지는 이가 없다. 화해와 명예회복의 시작은 가해자의 사죄뿐만 아니라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한 책임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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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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