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 한창 때는 예뻐 보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제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집 밖을 나설 때면 뽀얗게 분칠을 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발목을 접질려 가면서도 굽 높은 구두를 고수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타인의 시선에 무뎌지고, 외모 꾸미기에 용쓰던 것도 시들해졌다. 그저 남한테 추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에 만족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지막 자존심이라 여기며 여전히 무던해지지 못하는 건 '흰머리의 굴레'다.
나는 남들보다는 머리가 늦게 센 편이다. 그래서 영영 흰머리가 안 날 줄 알았다. 아니다. 흰머리가 안 났으면....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락없이 내 머리에도 어느 날부터인가 한 올 두 올 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어찌나 눈에 거슬리던지 보이는 족족 뽑아댔다. 한 번 뽑으면 다시는 안 난다고 주변에서는 만류했지만, 내 딴에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어서 뽑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큰 거울 앞에 서서 흰머리를 뽑는 날이 거듭되다 보니, 한 자리에서 100개까지 뽑는 날이 들이닥쳤다.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새치 염색을 하러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한창때 멋 부리느라 머리카락을 물들일 때와 영판 달라서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쭈뼛쭈뼛 새치 염색을 부탁했다. 염색을 마치고도 원하는 색이 예쁘게 나왔는지를 살피기 전에 흰머리가 잘 가려졌는지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팔뚝이 저리도록 흰머리를 뽑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라 하던 해방감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염색하는 횟수가 늘자 얼마 못 가 염색을 하고 나면 두피가 가렵고, 군데군데 뾰루지가 올라왔다. '염색약 알레르기'였다.
병원에서 처방받고 약 먹으면 가라앉는다는데, 이쯤 되자 '그렇게까지 해가며 머리 염색을 해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눈부신 백발을 날리는 어르신들을 뵈면 '새치난 머리보다는 차라리 하룻밤 자고 나면 저렇게 새하얀 백발이 돼 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기까지 했다.
뽑을 수도 없고, 머리 염색도 여의치 않자 차선책으로 모자를 쓰고 다니게 됐다. 모자는 흰머리를 감추기에 제격인데, 가끔 모자를 벗고 볼썽사나운 머리칼을 드러내야 할 때는 보통 난감한 게 아니다. 그래서 빈번하게 염색하자니 여러 가지 여건이 마땅찮으니 급할 때만 어쩌다 한 번씩 셀프 염색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호호백발만은 보여 주기 싫다던 할머니와 어머니
도대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생겼지? 염색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최근에 잘 시간만 되면 머릿속이 근질근질하다. 가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검지 손톱으로 정수리 일대를 여러 차례 긁게 된다.
하얗게 세는 머리칼이 날로 느나 싶어 내심 걱정이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할머니께서 가끔 "와서 머리 좀 긁어라" 하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께서 베개에 머리를 뉘면 나는 양손 엄지손톱을 마주하여 할머니 두피를 힘줘가며 쪼아댔다. 흡사 옷이나 이불에 붙은 이나 벼룩을 잡을 때처럼. 그렇게 해 드리면 할머니께서는 엄청나게 좋아하셨다.
"이게 그렇게 시원하세요?" 여쭈면, "너도 늙어봐라. 이다음에 알게 될 거다"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셨다.
항상 까맣게 머리를 물들여 정갈하게 쪽지시던 할머니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어머니도 미용실에 가지 않고 꼭 집에서 머리 염색을 하신다. 미용실에서 염색하면 금방 색이 빠진다는 게 이유였다. 또한 시중에는 모발 손상이 적은 좋은 모발 염색제가 나와 있는데도 여전히 약국에서 파는 값싼 염색약으로만 머리를 물들인다. 한 병으로 여러 번 염색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수십 년을 그 염색약만 써온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정수리가 휑해져 볼썽사납다.
"인제 그만 백발로 다니시면 어때요?"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도 관리만 잘하면 멋스럽다고 종용해도 소용없다. 그건 머리숱 많은 사람들 얘기라며 들은 척도 안 하신다. 백발로 다니는 건 싫지만, 탈모는 은근 걱정이신지 샴푸도 예사 것은 안 쓰고, 두피에 좋다는 마사지 오일도 잊지 않고 챙겨 바르신다.
그러다 한 날은 "김수미 두건 좀 알아봐라" 부탁하시길래 꽃무늬 들어간 것으로 사 드리려 했더니, "너무 비싸다. 관둬라" 만류하신다. 값도 값 이려니와 앞치마와 함께 쓸 때만 어울리는 걸 알아채신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모자 하나를 장만하려던 참이다. 칠순에도 백발만큼은 남들한테 보여주기 싫은 울 엄마께 어울릴 만한 꽃모자도 골라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