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과 항암치료로 고통스럽게 생명을 연장해가며 녀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의 짐을 짊어지게 할 바에 차라리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서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녀석들의 절실한 희망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송성영
나를 살려낸 것은...
다 죽어가는 나를 멀쩡하게 살려놓은 것은 의사의 처방이 큰 몫을 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수많은 동물들과 사람들, 그 누군가의 희생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살려놓은 별의별 수액들. 그 수액들이 거부감 없이 몸으로 흘러 들어와 나를 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동물들의 생체 실험이 뒤따랐을까요.
동물들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사라질 때까지 알게 모르게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내 몸속으로 들어와 생기를 불어넣은 혈액. 나와 같은 혈액형을 가진 그 누군가의 자비심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축농증 수술을 받거나 시원찮은 치아 때문에 종종 치과에 다니곤 했지만 입원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다섯 봉지의 피 주사를 맞아가며 병상에 누워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입원 닷새째부터 여유가 생겼습니다. 빠른 속도의 인터넷 덕분에 삼부자가 노트북 앞에서 킥킥 거리며 영화도 실컷 보았지요, 우리가 사는 산막에는 TV는 물론이고 인터넷 선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야, 병원이 이렇게 편한지 몰랐다. 뜨건 물에, 스팀 팡팡 나오지, 인터넷도 빵빵 터지지... 가만히 누워 있어도 밥 갖다 주지... 호텔이 따로 없다야."
"근디 호텔은 가봤어?"
"아니? 아참 가봤다. 신혼여행 때도 안 가봤던 호텔을 북한 금강산 갔을 때 가봤다."
"언제?"
"니들 어렸을 때. 금강산 상품권이 걸린 공모전에 당선돼서 니들 엄마하고 가봤지... 암튼 침대가 텅텅 비어 있으니까 2인실 병실이나 다름없다. 니들 오늘은 둘 다 자구 가라."
두세 살 무렵부터 텔레비전 방송도 보기 힘든 산골과 바닷가 외딴집 생활에 잔뼈가 굳은 두 아들이었지만 인터넷조차 들어오지 않는데다가 지게질로 땔감을 구해 아궁이 불을 지펴야 하는 산막 생활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녀석들은 병상 한 옆댕이에 보호자 의자로 간이침대를 만들어 놓고 교대로 산막과 병원을 오가며 조직검사 결과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수염발 허연 철부지 아버지와 문명의 이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입원 엿새째 날, 기다리던 내시경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 삼부자는 의사의 입을 주시했습니다. 내시경을 마치고 나서 나름 짐작 가는 게 있다던 담당 의사가 조직검사 결과가 적힌 차트를 넘겨보던 시선을 안경너머로 치켜뜨며 말했습니다.
"거의 확실합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며 확신에 가까운 답을 덧붙였습니다.
"조직검사 결과 위암일 가능성이 칠십 퍼센트가 넘습니다."
의사와 달리 애초에 위궤양을 기대했는데 암이라니? 기대치와 너무 벗어났습니다. 멍한 기운과 함께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스며들었습니다. 내가 처한 세상이 허상세계처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숨이 막혀 죽음이 목구멍으로 바싹 다가왔던 일주일 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괜찮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암일 확률이 70%라 하지 않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조직검사 결과로 볼 때 중기 위암으로 보면 됩니다. 좀 더 자세한 검사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받아 보시죠."
우리 삼부자는 70%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사실 70%가 절망이고 희망은 30%에 불과한데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편리대로 해석하기 마련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