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은 조선조에는 상촌, 웃대, 준수방, 인달방, 순화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조선 후기의 한양 공간은 신분과 직업에 따라 주거를 달리했기 때문에 그 속성에 따라 구분이 되었다. 서울 지역 사람을 크게 북촌·남춘·중촌·상촌·하촌으로 구분했다. 각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의 말투도 북촌은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워우며, 남촌은 빠르고, 중촌은 거만하며, 상촌은 공경스럽고, 하촌은 상스럽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한양 사람들의 말투를 소설 문체에 반영하여 이름을 얻은 작가로는 횡보 염상섭과 구보 박태원이 있다. 특히 박태원은 1930년대 경성사람들의 움직임과 삶의 양태를 고현학(modernology)적 관점에서 관찰하여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세를 탔다.
일제 강점기로 이어진 1924년 <개벽>의 글을 보면, 이러한 신분과 거주지의 분할을 확인하게 된다.
북산 밋흘 북촌, 남산 밋흘 남촌, 낙산 근처를 동촌, 서소문 내외를 서촌, 장교·수표교 어름을 중촌, 광통교 이상을 우대, 효교동 이하를 아래대, 강변을 오강, 성 밧 사면십리 이하를 자내(字內)라 함은 ...(중략)...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엇스며 또 같은 문반의 양반이로되 서촌에는 서인이 살엇스며 그 후 서인이 다시 노론 소론으로 난위고 동인이 디시 남인 북인 또 대북 소북으로 난위에 밋처는 서촌은 소론, 북촌은 노론, 남은 남인이 살엇다고 할 수 잇스나...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381쪽)
요즘 공간 시각에서 설명하자면 서촌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상대마을(上村), 웃대로 주로 불리었다. 이곳은 서인 그중에서도 소론의 양반계층과 루하동 근처에는 대전별감 계층, 그리고 시전상인들이 많이 살았다. 시전 상인들만은 중인층인 서리들과 사회적 처지가 같아 서로 어깨를 나란히 했고, 상촌인으로 불렸다. 이 우대사람이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문화를 이끌어갔던 여항인의 핵심이다.
또 서헌 임준원의 <완암집> '이향견문록'에서는 "서울의 풍속은 남과 북의 차이가 있다... 백련봉 서쪽에서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주로 가난한 집들로 유식하는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왕왕 협기있는 무리들이 있어 의기로 서로 사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약속을 중히 여긴다. 또 시인 문사들이 시절마다 서로 모여 다니며 임천과 운월의 즐거움을 다한다.고 당시 서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언급하였다. 지금도 당시 협객들이 활쏘기를 하던 백호정터가 남아있다.
서울의 중간 계층으로 이루어진 여항인들은 18세기 상업도시 서울이 배출해낸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양반 사대부계층과 기질이 완연히 달랐다. 소위 상업자본주의가 배출해낸 부르주아계층의 특성을 지녔다. 물론 그들은 시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서 양반과 동질의 상층문화를 즐기려고 했다.
여항인들에 의해 향유된 문화는 종전 충효열의 유교적 강상윤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성욕과 같은 인간 본성을 긍정하는 등 양반 사대부들의 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겸재 정선이 상촌에 살면서 '수성동(水聲洞)', 76세 때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등을 발표한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서촌에 시인이자 소설가인 모더니스트 이상(1910~1937)이 살았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상은 1934년 구인회에 가입을 하였고, 이태준의 주선으로 시 <오감도>를 발표하여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1936년 소설 <날개>를 비롯해서 <지주회시>, <봉별기>, <종생기> 등을 연이어 발표한다. 우리는 <지주회시>에 주목하게 된다. 여항인의 전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표제에서 '지주(蜘蛛)'는 거미를, '회시'(會豕)는 돼지를 의미한다. 소설 속의 '나'는 카페 여급인 아내를 뜯어먹고 살며, 아내는 카페에서 손님들의 주머니를 노리며 산다. 이들 거미에게 카페의 단골손님 왕돼지 전무가 뜯어먹히는 사건이 이 작품의 큰 줄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아내의 술책을 파헤침을 통해 가족과 사회의 퇴폐와 병리현상을 조롱하려는 데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서촌에는 이상이 세 살부터 약 20여 년간 살았던 '이상옛집'이 보존되어 있다. 철거될 위기에 있던 '이상옛집'을 시민모금과 기업후원으로 매집하여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 1호로 보존한 것은 한국인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서촌이 예술가들의 창조적 산실이 된 것은 세종대왕과 연관성이 크다. 한국인들에게 여론조사를 해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대체적으로 남성들은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여성들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든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이 태어난 곳이 바로 준수방으로 불리던 서촌이다. 그래서 2010년 서촌 주민들이 이 마을을 '세종마을'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여 3호선 전철역사 '경복궁역' 지하 공간부터 '세종마을'이 널리 홍보되고 있다. 서촌에는 송강 정철 집터, 이항복 집터, 정선의 집터 등이 있고, 근현대에는 이상, 이중섭, 윤동주, 이상범, 박노수, 노천명 등이 거주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최근 한국의 한류에 반해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자주 찾는 곳은 경복궁과 그 인근에 있는 '세종마을 음식거리' 그리고 '통인시장 도시락 카페'이다. 통인시장 이층에 있는 도시락카페에서 500원 단위 조선시대 엽전을 10여 개 구입하여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찜해둔 반찬들을 교환하여 도시락에 담아 먹는 방식이다. 닭강정, 부치개 꼬치, 떡볶이, 손만두 등이 인기품목이다.
통인시장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면, 필운대로가 나오고 그 주변에 노천명 시인이 살던 집터, 청전 이상범 화백의 창작공간, 박노수 화백의 주택과 수많은 공방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