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7일 민주노동당이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출범식을 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의제는 이후 민주당 등 다른 정당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권박효원
민주노동당이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지향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에 진출했다면, 민주노동당의 활동은 마땅히 이 구호의 실현에 집중돼야 했다. 진보정당의 이상이나 본분을 따지기 전에 이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선거는 유권자로부터 어떤 위임을 받을지 확인하는 과정이고, 피선출자는 대의기구에서 무엇보다 이 위임을 첫째 기준으로 삼아 행동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는 많았다. 노력도 없지 않았다. "빈곤과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당의 모든 활동을 빈부격차 해소에 집중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이른바 4대 개혁(국가보안법 개폐 등)을 놓고 여당 열린우리당과 협력하는 데 치중하던 당내 주류에 맞서, 당시에 막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던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정부·여당에 대해 대결의 자세를 취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당력을 총선 때 약속한 바의 실현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러겠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고 대중에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4대 개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열린우리당 2중대가 돼도 좋다"는 말이 당 안에서 나왔고, 점차 당 밖의 많은 이들 역시 민주노동당을 이 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정의당이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리버럴정당 2중대' 프레임이 이미 이때 구축된 것이다.
"서민"의 자리에서 "부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민주노동당의 다른 얼굴들 역시 소중한 자산에서 무거운 짐으로 돌변했다. 창당의 버팀목이었던 민주노총의 지지가 그러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자 대기업-정규직이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주노총이 극우 언론의 공격에 취약해졌다. 덩달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에 바탕을 둔 민주노동당 역시 "먹고살만한" 노동자들만 대변하는 정당이라 비난받기 시작했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 이후에도 2004년 총선에서 내걸었던 구호에 충실한 정치를 펼쳤다면, 이런 공세에 무력하게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