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성의 모습.
문선호
실제 그는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선대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보냈다.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으며, 증조부는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의병운동을 했고, 조부는 의병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며, 부친도 한학에 밝았다고 한다. 그는 늘 이런 집안의 배경과 자신의 문인화 정신을 연결시켜 자부심을 보이곤 했다.
장우성은 어려서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천성이 다정다감하여 자연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달밤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집안에 유독 책이 많아 법첩을 보고 글씨를 쓰기도 하고, 옛 그림을 보고 베끼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입문
13, 14세 경 어머니와 서울 외가에 왔다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일본어를 배우려 하자, 부친은 일본 사람 앞잡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환쟁이가 되라며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침 건너 마을에 이당 김은호의 매부가 살고 있어 부친의 부탁으로 김은호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부친 장수영(張壽永)은 서울로 떠나는 아들에게 달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월전(月田)'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1930년 서울에 올라온 장우성은 종로 단성사 뒤쪽 봉익동에서 하숙을 하며, 창덕궁 앞 권농동에 있는 김은호의 화숙 '낙청헌(絡靑軒)'에 들어간다. 그때 나이 19세 때였다. 이때 낙청헌에는 백윤문, 이석호 등 선배들이 있었고, 동년배들로는 김기창이 두어 달 먼저 들어와 있었으며, 조용승, 한유동, 장운봉, 조중현, 이유태 등도 있었다.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우는 한편, 당대의 명필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운영하는 '상서회(尙書會)'에 나가 글씨를 배운다. 여기에서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을 처음 만나 평생지기로 지낸다. 두 사람은 10년의 나이 차이가 났으나 서로 뜻이 맞아 가까이 지냈다. 손재형은 서화골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장우성이 훗날 서화골동에 눈을 뜨게 되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화협회와 조선미전에서의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