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무등산 정상을 개방하는 날이다. 아침 8시 광주를 출발했다. 화순 '들국화마을'을 통해 오르기로 했다. 틀에 박힌 코스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보는 것도 산행의 맛이다. 무등산은 광주, 화순, 담양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이다.
제주, 청송에 이어 2018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무등산 정상 3봉(천·지·인왕봉)과 서석대·입석대 등 지질 명소 20개소, 죽녹원·아시아문화전당 등 역사 문화 명소 42개소가 이에 속한다. 도심에서 가까이 있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포근한 산이다.
젊은 시절 더위를 피해 증심사, 산장 등 계곡을 자주 찾았다. 힘들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도 중머리재, 바람재 등을 가볍게 다녀오곤 했다. 80년대 암울한 시기에는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꼭두새벽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들국화마을에서 장불재와 안양산 갈림길까지의 0.8 km 구간은 나무그늘이 이어지는 숲길이다. 산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 그놈의 미세먼지, 마스크, 플라스틱...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풀 내음, 흙 내음, 새소리 이런 자연의 선물을 잊고 살았다.
헐떡이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는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더위 탓인가, 세월 탓인가.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산행이 힘들다. 산이 높아진 것은 아닐 테고... 힘들게 오르지 않으면 정상에 오른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백마능선에 들어섰다. 백마능선은 완만한 길이라 가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동으로 굽이굽이 산 너울에 하얀 풍차가 한 폭의 동양화다. 북으로는 천왕봉이 있는 정상이다.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길 좌우에도 허리를 넘게 자란 철쭉이 길게 도열해 있다. 아직은 남아 있는 붉은 꽃길을 걸으며 잠시 향기에 취하고 간혹 들리는 새소리에 취한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이제부터는 길이 완만하다.
장불재는 중머리재와 더불어 정상을 오르는 쉼터이기도 하다. 전에는 화순·광주 지름길로 이용되었다. 천막 안에서 몇 사람이 심폐소생술 체험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 둘이 높은 바위에 올라 입석대를 바라보고 있다. 돌기둥의 웅장한 신비로움, 자연의 위대함에 놀라고 있는 게 아닐까.
암자 위에는 괴석이 쫑긋쫑긋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친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다.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 같아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긴 홀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든든한 요새다. 투구 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켜 우연히 이렇게 괴상하게 만들어졌을까. 신공귀장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 한 것일까. 누가 구워냈으며 누가 지어 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의병장 고경명의 무등산 기행기 '유서석록' 중 일부다. 주상절리의 입석대, 무슨 말이 필요하랴. 누가 구워내고, 누가 지어 부었을까.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본다. 멀리 녹음 사이로 입석대의 돌기둥들이 우뚝우뚝 늘어서 있다.
입석대를 지나 서석대에 이르자 탐방객 행렬이 보이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처음 개방했을 때는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로 장불재 일대가 개미처럼 까맣게 줄지어 있었다. 인파에 떠밀려서 오르다시피 했다. 지금은 생태계 보호 및 사고예방을 위해 사전 예약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인왕봉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 북으로 지왕봉이 자리하고 동으로는 천왕봉이다. 아직 군사보호시설이라 사진 촬영이나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침 8시에 광주에서 출발 화순 들국화마을에서 8시 30분 도착, 들국화마을·장불재 코스를 통해 정상까지 걸린 시간은 6시간 정도다.
맑은 날은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월출산 천황봉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안개가 낀 듯 하늘이 뿌옇다. 인증사진을 찍기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급수대가 눈에 띈다. 1200m 지하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다. 무등산 정상에서 물 한 잔이 시원하다.
덧붙이는 글 | 1. 유서석록의 입석대 인용글은 무등산(박선홍 지음)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