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 터지는 부분은 가차 없이 분노하는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교통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곳,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 기자 말    
 
 지난 28일 폐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1005-1번 버스.
지난 28일 폐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1005-1번 버스. ⓒ 박장식
  
"명찬이 오빠는 취해서 실려가고, 오빠가 바래다줬었죠. 1005-1번 좌석버스 타고..."

-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 중 윤경(이요원 역)의 대사


분당신도시에서 강남대로를 거쳐 서울 도심을 오가던 1005-1번 버스가 지난 28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단 세 대가 1시간 간격으로 세 지역을 오가던 버스는 심야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대리기사들이 뒤엉켜 붐볐지만, 다른 시간대에는 찾는 이가 없던 대표적인 적자노선이었다.

그런데 1995년 개통, 23년간 운행된 1005-1번 버스는 광역버스의 시초나 다름없다. 이 노선을 기점으로 시내버스가 금단의 땅 같던 고속도로를 자유로이 달리기 시작했고, 많은 시외버스가 광역버스로 바뀌기도 했다. 1005-1번 버스가 국내 광역버스에 끼친 발자취를 다시 짚어본다.

고속도로 타고, 전철보다 빠르고...
 
 1005-1번 버스는 분당과 강남, 광화문을 이으며 큰 성장폭을 이어갔다. (1995년 9월 13일 KBS 9시 뉴스 캡쳐)
1005-1번 버스는 분당과 강남, 광화문을 이으며 큰 성장폭을 이어갔다. (1995년 9월 13일 KBS 9시 뉴스 캡쳐) ⓒ 한국방송공사
 
1005-1번 버스는 분당신도시 입주가 시작된 1995년 개통했다. 이미 분당신도시에는 분당선과 서울특별시 면허의 1005번 버스가 있었지만, 1005번 버스는 수서동, 고속터미널 등으로 빙 돌아가 자동차보다 경쟁력이 약하며, 분당선은 수서에서 3호선을 갈아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1005-1번은 그간 어떤 버스도 이용하지 않았던 남산 1호터널을 통과했다. 한남대교를 거쳐 을지로 2가에 바로 도달하는 방식은 그간 서울 출근을 위해 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던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되었다. 또한 정체 시 크게 막히는 시내 도로 대신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한 점도 사람들의 구미를 당겼다.

당시 1005번은 분당에서 수서, 반포대교를 거쳐 1시간 반 정도면 서울 도심에 도달했고, 분당선과 3호선을 갈아타 서울 도심으로 향하면 1시간 10분이 걸렸다. 하지만 1005-1번을 타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강남까지는 40분, 도심까지는 막히지만 않으면 1시간이면 도달했다. 전철보다 빠른 버스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요금함에는 천원짜리 가득했던 그때 그 시절
 
 버스카드 시범 도입이 이루어졌던 첫 번째 버스는 1005-1번이었다. (1995년 9월 13일 KBS 뉴스 캡쳐)
버스카드 시범 도입이 이루어졌던 첫 번째 버스는 1005-1번이었다. (1995년 9월 13일 KBS 뉴스 캡쳐) ⓒ 한국방송공사

시간 단축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05-1번 버스에는 조간신문이 좌석마다 비치되고, 공중전화가 버스마다 배치되었다. 1300원 받던 요금도 개통 한 달만에 천 원으로 내렸다. '마이카 시대로 버스업계가 적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용객이 대여섯 배 폭증했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승객이 폭발적으로 늘자 20대를 더 투입한다"는 내용도 나온다.

1005번도 부랴부랴 노선을 분당-내곡 고속화도로를 이용하는 것으로 변경했지만, 1005-1번 이용객 폭주를 막기 어려웠다. 당시엔 강남과 광화문을 잇는 노선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출퇴근 시간에는 승객들이 통로까지 꽉꽉 들이차고,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퇴근객과 유흥객이 함께 탑승해 요금함이 천 원짜리로 들어차기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조금씩 늘어난 버스의 인가 대수는 130여 대가 되었다. 수도권 동남부권에서 이 노선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고, 수지에서 출발하는 지선이 생기는가 하면 강남대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서울 도심으로 향하는 급행 지선도 생겨났다. IMF로 인해 여럿이 어려웠다지만 1005-1번만은 그때 최호황기를 누렸다.

1005-1번 버스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기록도 세웠다. 1995년 9월, 버스카드 시스템이 1005-1번과 1113번(경기 광주시-동서울터미널) 버스에 최초로 적용,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버스카드는 그해 12월 서울시 전체에서 쓰이기 시작한다.

또 1997년 4월에는 1005-1번 버스 안에서 전광판으로 다음 정류소 안내나 뉴스속보 등을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가 시행되기도 했다. 지금의 G-BUS TV의 대선배격인 이 전광판은 실시간 정보를 버스 안에서 얻기 어려웠던 시절, 당시 태동기였던 이동통신 기술을 대중교통 고객을 대상으로 이용한 첫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영원한 왕좌는 없다... 신분당선 개설로 타격
 
 1005-1번은 심야버스로의 기능도 해냈다. 새벽이 깊어가면 갈수록 1005-1번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줄은 길어져만 갔다.
1005-1번은 심야버스로의 기능도 해냈다. 새벽이 깊어가면 갈수록 1005-1번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줄은 길어져만 갔다. ⓒ 박장식

1005-1번이 일대에서 차지한 위치는 점점 다른 광역버스로 이어졌다. 1005-1번의 급행 지선이 9000번이 되어 28대를 가져갔고, 서판교, 용인, 광주 일대에서 출발하는 노선들도 1005-1번의 인가 대수를 가져갔다. 그럼에도 1005-1번은 2000년대 이후에도 10여 년간 분당과 서울을 잇는 대표 버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005-1번의 위세는 신분당선 개통에 꺾였다. 2011년 개통된 신분당선은 1005-1번이 주요 수요처로 삼던 강남과 분당 간의 소요시간을 1005-1번의 30여 분에서 16분으로 대폭 단축했다. 소요시간을 무기로 성장한 버스가, 더욱 빠른 소요시간과 정시성을 무기로 한 철도노선과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결국 점점 이용객이 줄었다. 심야 수요 역시 2013년 올빼미버스가 생겨나며 큰 타격을 입었다. 실제로 경기도 교통 통계에 따르면 2014년 매일 8300여 명이 이용한 1005-1번은 2018년 2400여 명으로 3분의 1토막이 났다. 결국 10월 27일은 1005-1번 버스의 마지막 운행날이 됐다. 

지금의 광역버스 있게 한 일등공신

시대의 흐름을 타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1005-1번은 지금의 광역버스가 있게 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이 노선을 기점으로 좌석버스들이 고속도로와 고속화도로 위에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한 도시와 다른 도시를 빠르게 잇는 광역버스의 개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운영에서 발상의 전환이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증명했다. 1005-1번의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교통카드로 편리하게 타는 광역버스 대신, 복잡한 좌석버스나 비싼 시외버스가 아직도 수도권 교통망을 형성하고, 신도시의 필수요소라는 광역급행버스도 도입되지 못했을 것이다.

광역노선을 철수한 지 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인천 삼화고속이 회자되고 있듯 '분당의 1005-1번'이 앞으로도 사람들의 추억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 김주혁 나오고 이요원 나오던 영화에도 나왔던 그 버스, 나도 소싯적에 만날 타고 다녔는데..." 하고 말이다.

#광역버스#버스#1005-1번#좌석버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중교통 이야기를 찾으면 하나의 심장이 뛰고, 스포츠의 감동적인 모습에 또 하나의 심장이 뛰는 사람. 철도부터 도로, 컬링, 럭비, 그리고 수많은 종목들... 과분한 것을 알면서도 현장의 즐거움을 알기에 양쪽 손에 모두 쥐고 싶어하는, 여전히 '라디오 스타'를 꿈꾸는 욕심쟁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