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의 국제조계지(1920년대)
미상(저작권해제)
"동아시아 민족주의운동의 중심지"라 불리는 상하이는 1842년 '남경조약' 이후 통상항구로 개발되어 서구와 일본의 조계(租界)가 설치되었다.
프랑스 조계, 영국 조계, 일본 조계와 기타 몇 개의 조계가 더 있었는데, 프랑스 조계만 그냥 남고 나머지는 합해서 공공조계라 했다. 프랑스 조계는 길쭉한 형태였고 공공조계는 넓었으며, 그 외곽으로 중국인 행정구역이 있었다.
(주석 1)
상하이는 1920~1930년대에 이미 인구 약 300만 명의 거대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여 해상교통과 동양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시가지는 양자강 하구의 남만, 황포강이 양자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한국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프랑스 조계는 1866년에 개시되었고, 우리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프랑스 조계는 프랑스의 건국이념대로 자유ㆍ평화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1917년 6월말 현재 일본외무성 조사, 조선총독부 척식국 작성 자료에 따르면 1917년 중국 본토에 거주했던 한인 동포의 수는 다음과 같다.
상해(300명), 천진(154명), 지부(13명), 남경(8명), 산두(19명), 하문(5명), 청도(61명), 기타(4명), 계 564명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무렵 상하이에 거주했던 동포의 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여운형신문조서>와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의 <고등경찰요서>에는 각각 7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하이에는) 1910년대 초에 벌써 소규모의 동포사회가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동포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1910년대 후반인데, 1917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500여 명이었으며, 3ㆍ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는 1천 명 정도로 증가되었다.
(주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