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선생의 친구인 최천택이 훗날 남긴 글에 따르면, "암암리에 동지 규합에 힘을 기울여 박재혁ㆍ김인태(金仁泰)ㆍ김병태(金鉼泰)ㆍ김영주(金永柱)ㆍ장지형(張志亨, 장건상 조카)ㆍ오택 등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상업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반일 민족운동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실천하는 일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주석 1)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그것도 일경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학생들의 비밀 서클활동이 오래 가기는 어려웠다. 구세단 창단 6개월 만에 조직이 탄로나고 주도자 박재혁과 최천택ㆍ오택ㆍ박홍규ㆍ김인태 등 4인은 일주일 동안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과 배후 관계를 대라는 수사를 받았다.
왜경의 모진 고문으로 자제들이 반주검 상태라는 것을 안 학부형들이 경찰서에 찾아가 구세단을 자진 해체한다는 조건으로 석방을 요구하여 간신히 풀려났다. 일제는 학생들을 투옥하고 재판에 회부할 경우, 이들이 법정에서 일제의 야만성을 성토하고, 조선의 독립을 요구함으로써 일반 학생들이 동요할까봐 서둘러 풀어준 것이었다.
구세단 사건의 주도자들은 풀려났지만, 이 사건이 부산시내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학생들을 크게 각성시킨 것이다. 그런데 구세단이 학생들의 자발적인 항일지하 조직이었는지, 외부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것인지, 구세단 단장 최천택이 남긴 글이다.
15세 때인 1910년 8월 소위 일한합방이라는 흉보를 듣고,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하여 민심은 극도로 흥분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자진하여 광복단(光復団)에 입단하고, 암암리에 동지규합에 힘을 기울여 박재혁ㆍ김인태ㆍ김정태ㆍ김병주ㆍ장지형ㆍ오택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면서 부산제이상업학교에 통학하였다. (주석 2)
한 연구가는 이를 근거로 독립운동사상 3개의 '광복단'을 상정한다. 구세단이 이 가운데 어느 광복단과 연계되었는지는 여전히 확인이 어렵다.
첫째, 최천택이 기술한 위의 내용이 1910년 한일병탄이 있고 1,2년 사이의 일이라고 한다면 약간의 무리한 추측이지만 당시 러시아령으로 망명해 있던 신채호ㆍ이동휘 등의 신민회 일부 간부들과 윤세복 등 대종교 계열의 인사들이 결합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결성한 광복회와 일정 정도 연관을 가졌을 단체일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광복단이란 명칭과 관련하여 두번째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1913년 채기중ㆍ이관구 등이 귀국하여 경상북도 풍기를 근거지로 광복단을 결성하였는데 박재혁의 동지 최천택이 언급한 광복단은 곧 이들 풍기의 광복단과 연계된 부산지역의 비밀결사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시간적 편차는 있지만 최천택 자신이 1915년 결성된 박상진의 대한광복회와 일정 정도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최천택 자신이 마치 1910년 병탄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처럼 회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이든 최소한 박재혁과 그 동지들은 일찍부터 비밀결사 조직체와 관계를 맺고 항일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1910년대 학생 신분으로 역사책을 읽으면서 항일의식을 키워나가던 박재혁과 그들의 동지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비밀결사체인 구세단을 1913년 조직하기에 이른다. (주석 3)
주석 1> 김도형 <독립운동가 박재혁>, <이달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 2012. 2.
주석 2> 최천택, <일제하의 독립투쟁기>, <부산의 고금> (박원표 저, 수록), 142~143쪽.
주석 3> 김승, <박재혁의사의 의열단활동과 독립운동>, <부산 항일학생의거 74주년, 광복69주년 기념 전국학술세미나> 발표논문, 201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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