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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글루호프스키의 명작 <메트로 2033>을 보면,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스크바 지하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세력 중의 하나로 '제4 제국'이 등장한다. 제4 제국의 정식 명칭은 The Fourth Reich다. 히틀러의 제3 제국(The Third Reich)을 이어받은 자들, 즉 네오나치다.

네오나치가 히틀러와 스와스티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국가정책으로 공공연히 실행되었던 인종차별을 향한 로망일 것이다. 로망, 즉 '낭만'의 사전적 정의는 '현실적이지 않고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다. 인종차별은 현실적 옵션이 아니다. 법이 제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이라는 로망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선거다.

선거를 분노 표출의 기회로 삼는 그들

미국 정치 관련 유명한 책으로 토머스 프랭크의 <캔자스 대체 왜 그래? (What's the Matter with Kansas?)>(우리나라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로 번역돼 소개됐다)가 있다. 중앙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주 캔자스가 선거 때마다 부자를 위한 정책을 펴겠다는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를 파헤쳐보겠다는 책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 이유는 공화당의 교묘한 선거 공작 때문이다. 언어의 마술사인 공화당이, 선거 때마다 교묘한 프레임을 정치 현실에 덧씌워 표심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회적 평등은 모든 선거에서 이슈로 등장한다. 공화당은 평등이라는 이슈를 그대로 다루지 않고, 폭발력을 가진 몇몇 이슈로 재포장한다. 낙태라든가 동성 결혼 합법화 같은 것들이다.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테레오타입에 물들기 쉬운 일반 대중은 낙태나 동성 결혼과 같은 사악한 이슈를 지지하는 진보 엘리트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그들은 선거를 분노 표출의 기회로 삼는다. 그 결과, 한때 좌익 포퓰리즘의 산실이었던 캔자스는 이제 진보의 무덤이 되었다.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테레오타입에 물들기 쉬운 대중'이라는 명칭 하에 도매금으로 떠넘겨지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미국 대중문화에서 저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일관되게 묘사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레드넥(redneck. 미국 남부의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백인 농부, 노동자를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됨, 욕체노동으로 햇빛에 목이 붉게 타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드 <워킹 데드>의 최고 인기 캐릭터, 대럴 딕슨. 전투력, 생존 능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이타적인 레드넥이라니.
미드 <워킹 데드>의 최고 인기 캐릭터, 대럴 딕슨. 전투력, 생존 능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이타적인 레드넥이라니. ⓒ AMC
 좀비가 들끓는 세상에서 인간의 사투를 다룬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대럴 딕슨(Daryl Dixon)이다. 그는 아주 전형적인 레드넥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토바이, 팔뚝이 드러나는 가죽 재킷, 낮은 교육수준을 드러내는 단어들, 타 인종에 대한 증오, 그리고 생존주의.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드라마에서 생존주의로 무장한 레드넥이 잘 나가는 것은 필연적일까. 역시 레드넥인 그의 형은 오토바이에 항생제까지 상비하고 있었다. 마초의 화신이 상비약 꾸러미를 오토바이 수납 칸에 정성스레 챙겨 넣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웃기지 않은가.

<심슨 가족>이나 <사우스파크>에서 마치 오징어 땅콩 먹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껏 조소하는 레드넥이 과연 그냥 조소의 대상일까. 콜린 우다드의 <제국의 분열>을 읽다 보면, 미국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레드넥의 힘에 놀라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북미에 존재하는 11개 국가(nation) 중 그레이터 애팔래치아(Greater Appalachia)가 바로 레드넥의 조상 격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레드넥

그들은 원래 영국에서 지주에게 착취당하던 빈민이며,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국경 지대에서 늘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들을 종종 '국경지대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건너온 신세계에서 만난 것은 타이드워터(Tidewater)와 남부 심연(Deep South)의 지주들, 그리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떠나온 고향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투쟁하는 삶을 다시 살아야 했다. 그들은 조직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사안마다 내부 분열을 겪었지만, 그들 다수는 언제나 미국 역사에서 승자의 편에 섰다. 아니, 이 정도 승률이라면 그들이 가담한 쪽이 승리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독립전쟁 당시 그들 대다수는 독립을 지지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 누구의 간섭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 대부분은 미들랜드의 필라델피아를 통해 신대륙으로 들어왔지만 정치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 지배층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기회로 독립전쟁을 이용했다.

남북전쟁 당시에도 애팔래치아 대부분은 북부에 가담했다. 콜린 우다드에 따르면, 남부 연합, 즉 딕시(Dixie) 연합은 비폭력적인 방법에 의존했다면 분리 독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섬터의 연방 시설을 무력 공격함으로써 자충수를 두었다. 이 무모한 공격은 당시까지만 해도 중립을 표방하던 뉴네덜란드와 미들랜드를 적으로 돌렸다.

애팔래치아로서는, 양키나 딕시 연합이나 자신들을 간섭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양쪽 모두를 증오했다. 그런데 섬터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둘 중 남부 연합이 더한 간섭쟁이인 것으로 드러났다. 버지니아가 연방 탈퇴를 강행하자, 버지니아 서부의 국경지대인들은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별개의 주를 만들었다.

남북전쟁 당시, 애팔래치아의 레드넥들은 북부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도 애팔래치아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남부와 연합한다. 승자인 북부 연합의 맹주인 양키는 자신들의 청교도적 신념에 따라 미국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국경지대인들에게 이것은 과도한 간섭이자 문화적 제국주의일 뿐이었다.

이들의 후예가 현재의 레드넥이다. 이들은 21세기 첫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를 백악관에 입성시켰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호전성을 발휘하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부시에 이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배경에는, 8년 동안의 어리석은 정치에 신물이 난 미국 국민들의 반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에 이어 대통령이 된 사람은 또다시 레드넥의 비호 하에 백악관에 입성한다.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그들은 자신들과 정반대인 인물을 열렬히 지지해서 여론조사 결과를 뒤엎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자유무역을 훼방 놓겠다는 대담한 막말과 공개적 차별주의는 이민 미국인들을 적으로 돌려 세웠지만, 그 대가로 트럼프는 레드넥의 열광적인 성원을 얻어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단 하나의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레드넥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레드넥#선거#가난한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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