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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편지를 썼어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한밤을 꼬박 새워 편지를 썼어요

가수 이장희 씨의 노래 한 구절인데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수라기보다 시인이라고 부르더구나. 편지에 얽힌 수많은 추억이 있지만, 오늘은 너의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마.

설이나 추석 며칠 전이면 할아버지는 항상 누군가에게 몇 통의 편지를 쓰고는 했었어. 아버지는 심부름이나 했지 누구에게 쓰는지 모르지. 할아버지가 한지에 가는 붓으로 쓴 편지 몇 통을 독립군의 밀서라도 되는 듯 가슴에 품고 아재랑 시오리 길을 걸어 양덕원 면에 있는 우체통에 넣으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도 걱정이 돼서 괜히 우체통 입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지. 아버지가 서울 올라오던 그해 추석도 편지 심부름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눈가를 적셔가며,

"우리 손자 서울 가면 할아버지 편지 심부름 누가 해줄꼬?"

편지는 양덕원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신 할아버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직접 전해드려도 될 걸 왜 우체통에 넣으시라는지, 어린마음에 갸우뚱했지. 그런데 너의 할아버지 삼 남매가 전부 증조할아버지 친구인, '용 선생님' 제자거든.

장날 양덕원 장엘 가면 친구인 용 선생님을 만나 "이놈아 저놈아" 막걸릿잔을 들지만 용 선생님이 집에 오시면 자식들의 선생님으로서 깍듯하게 대접을 하셨다. 용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메밀전병을 부치고 면에서 막걸리가 통으로 왔는데 나중에는 동네잔치가 벌어지고는 했다.

용 선생님이 사랑채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 해장술을 곁들여 따듯한 진지(어른들이 드시는 식사)를 드시면 아재가 짐 자전거로 선생님을 모셔다드렸다. 그런데 선생님이 자전거에 오르기 전 한마디가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았지.

"이놈들 공부는 안 하고 성당에서 신부님 고무신 훔쳐다가 엿바꿔 먹고 성당에서 키우는 닭이 왜 없어지나 했더니 녀석들 짓이라고 신부님이 뀌뜸을 해주데. 어 고얀 놈들. 쯧쯧.'

덕분에 아재가 선생님을 모셔다드리고 오는 동안 이집 저집 아재 또래의 애들을 붙잡아놓고 매타작이 벌어지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용 선생님이 일 년이면 두세 번 오시는데 그날은 동네 어른들 잔칫날이요 애들 매를 버는 날이었단다.

아버지는 지금도 우체통 속으로 할아버지의 두툼한 편지가 툭, 떨어지는 그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어. 설마 그 편지 속에 "야, 이놈아 명절 잘 보내." 이렇게 쓰여 있었겠어? 자식 셋을 사람 만들어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친구로서의 다정한 인사가 쓰여 있었을 거야. 편지 중간에 근사한 시도 한 수 넣어가면서 그렇게 편지를 썼을 거야.

할아버지의 진한 피를 이어받은 아버지 역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밤새워 편지를 썼다. 좁은 다락방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편지지 한 줄을 채우기 위한 고뇌의 흔적이 수북이 쌓이고는 했어. 그렇게 겨우겨우 편지 한 장을 쓰고 나면 그래도 뭔가 부족해 시인의 시 몇 줄 보태고 나서야 봉투에 넣어 밥풀로 입구를 막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언덕길을 내려가 우체통에 퉁, 편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내 여자' 착각을 하기도 했지.

다락방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모자란 잠을 채우려고 눈을 감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편지 내용이 너무 유치한 거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지. 편지 속 모월 모일 만나자는 약속을 달력에 빨갛게 동그라미 쳐놓고 잠을 청하는 수밖에.

드디어 약속 날, 크리스마스 캐럴에 그녀의 손을 잠바 주머니 속에서 조물락거리며 밤새도록 명동거리를 쏘다니다가 명동성당 아랫길 따듯한 오뎅 국물에 마냥 행복했지. 오뎅 국물을 후후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맑았어. 고요한 크리스마스이브, 그렇게 내 가슴에 안겨 오던 사랑의 불길은 참으로 뜨거웠지.

그날 그 여인의 발그레한 볼에 "당신은 이제 내 사랑" 인감도장(뽀뽀)을 찍었지. 그 여인이 바로 네 엄마다. 아버지가 네게 편지를 쓴답시고 매일 잔소리만 하는 것 같아 오늘은 아버지의 로맨스 한 편을 부끄럽게 밝힌다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구나?



#딸바보#아버지#딸사랑#편지#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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