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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역사상 최악의 범죄이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가장 큰 교훈을 준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거나 엘리 위즐의 <밤>을 읽고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실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쉽게 말하고는 하지만, 그 말에 적합한 상황은 흔치 않다. 그런데 나치의 수용소가 바로 그런 경우다. 조디 피코의 <이야기꾼>은 흥미진진한 소설이지만, 나는 읽고 난 후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나치 수용소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이 쓴 넌픽션이 존재하는 한, 그것을 소재로 한 소설은 아무리 훌륭해도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표지
<죽음의 수용소에서> 표지 ⓒ 청아출판사
로고테라피를 개발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다른 홀로코스트 수기와는 다르다. 수용소 수감자들을 근접 거리에서 관찰한 정신과 의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용소 생활에서 나타나는 수감자들의 심리적 반응을 관찰하고, 어떤 차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만들었는지 고찰한다.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들의 심리적 반응은 세 단계에 걸쳐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33)

그가 말하는 첫 단계는 충격으로 요약된다. 도착한 곳이 아우슈비츠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극심한 절망의 감정에 휩싸이지만, 곧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에 빠지게 된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건강 상태가 좋아 보이는 수감자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 부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망상이 부정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그 모습을 벌거벗은 그대로 드러낼 때, 충격이 발생한다.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프랭클 박사가 끝까지 간직하고 있던 것은 자신이 쓰고 있던 과학서적의 원고 뭉치였다. 그는 고참 수감자에게 그 원고를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 했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이 원고는 내 인생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고참 수감자의 표정은 처음에는 동정 어린 빛을 띠었으나 곧 경멸과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빌어먹을 놈!"
그 순간 나는 진실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심리적 반응의 제1단계를 특징짓는 감정, 즉 충격을 경험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전부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42)


두 번째 단계, 즉 수용소의 일상에 적응한 수감자들의 심리적 반응은 무감각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단 한 가지 과제, 즉 생존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정신세계가 원시적 수준으로 퇴보한 수감자들의 원초적인 욕망은 꿈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즉 먹을 것, 담배, 그리고 온수 목욕에 관한 꿈을 꾼다.

이 단계에서 수감자들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외부환경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대신,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한다. 예컨대 빅터 프랭클은 내면에서 계속하여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간다. 머릿속에 정확하게 재현된 그녀는 그의 말에 대답하고, 그에게 웃어준다. 내면세계로의 도피로 피난처를 찾은 수감자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온몸으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상태에 이른다.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만약 어떤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호송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로 석양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 정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것이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81)

로고테라피의 핵심이며,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아래 문장은 바로 이 시기의 수감자들을 오랫동안 관찰한 빅터 프랭클의 결론이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120)

모든 희망을 잃고 무감각이 극도에 달한 상태가 되면, 수감자는 외부 자극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정신력도 잃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 이러한 현상은 아주 갑자기 나타난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중략)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134)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한 수감자는 1945년 3월 30일에 전쟁이 끝난다는 예언을 꿈속에서 들었다. 그는 꿈에서 얻은 계시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나 약속의 날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뉴스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3월 29일, 그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3월 31일 사망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조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138)

이 책의 원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 즉 '인간의 의미 탐색'이다. 로고테라피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정신질환을 치료하려는 시도다. 다만, 그 의미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우슈비츠에서도 빅터 프랭클은 살아남은 것이다.

세 번째 단계, 즉 자유를 되찾았을 때 수감자들의 심리적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당장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신의학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 하는데,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적 억압 상태에서 갑자기 해방된 상태는 마치 잠수병과 같다.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크게 해를 입을 위험이 큰 것이다.

이 위험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수용소의 야만적 상태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가해자의 위치에 서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복수의 피를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외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빅터 프랭클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잠수병에 걸린 상태였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통과 환멸감에 시달린다. 고향에 돌아갔는데 사람들은 고생했다고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할 뿐이다.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신이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 묻는다.

해방되었을 때,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지 못하리라는 것은 수용소에 있을 때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면, 더구나 앞으로의 삶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불행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환멸감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로고테라피를 확립하고, 이후에 강연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237)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공통된 고통 상태로 몰아넣으면 그 고통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하나로 사람들의 반응이 수렴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수용소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242)

돼지와 성자의 차이와 같이 분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 경험에서 얻게 된 가장 큰 가르침은 결국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삶의 의미는 결국 삶에의 의지로 변환된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게 되면, 우리는 삶에서 무한한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2005)


#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삶의 의미#로고테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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