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질'이 일상인 사람이오. 이 사람 저 사람을 다 부려 먹죠. 인사도 절대 먼저 안 해요. 상대의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그렇지 않든.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오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름도 '갑주'요."김갑주(56) 씨의 농 섞인 말이다. 김 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면서 음식산업을 하는 최고 경영자다. 광주광역시 시각장애인연합회장도 맡고 있다. '갑질'을 일상으로 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 그저 웃을 수만 없는 이유다.
"제가 실명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결코 지금보다 더 깊은 삶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실명이 내 삶을 더 건강하게 해줬다고 할까요. 각자의 삶이 다 소중하듯이, 저도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온 세월이 값지고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하루하루도 행복하고요."사람들과의 모든 만남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김 회장을 해남과 진도 여행길에서 만났다. 토속적인 진도민속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토요 상설 민속공연과 상·장례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열린 지난 8월 19일이었다.
기업가로, 사회사업가로서의 한길을 걷고 있는 김 회장은 대학교에 다닐 때 시력을 잃었다. 어려서부터 시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실명을 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시력이 더 나빠지더라고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행동이 어려울 정도로요. '생활이 많이 불편하겠구나' 생각했죠. 실명의 이유가 된 망막색소변성증이 어떤 병인지도 몰랐고요."실명에 직면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날마다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며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며 지냈다. 지인의 소개로 다른 시각장애인을 만난 게 반전이었다. 자신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시각장애인 상당수가 구걸로 생활하더라고요. 일부는 안마나 침술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요. 저의 번뇌가 사치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대학을 다니고, 부모로부터 도움도 받고 있었으니까요."
김 회장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익숙한 일보다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책 방문 판매, 의료보험 조합원 모집 일을 잠깐 했다. 친구와 함께 포장마차도 운영해 봤지만 돈벌이가 안 됐다.
곡절 끝에 광주가톨릭센터에서 다방을 운영하게 된 건 행운이었다. 몇 년 동안 다방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세상을 알 수 있었다. 세상과 어떻게 어우러지며 살아야 하는지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개인의 보람과 성취를 얻으면서 세상에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선택한 게 음식사업이었다. 야채 뷔페를 시작으로 외식산업, 단체급식, 김치사업까지 팔을 뻗었다. 그 과정에서 기업회생 신청과 함께 김치사업의 법정관리에 이은 폐업의 아픔을 맛봤다. 3년 만에 회생 인가를 받아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자신도, 이웃도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는 활동은 꾸준히 찾아서 했다.
"시각장애인을 '봉사'라고 하잖아요. 잠을 자도, 운동을 해도, 밥을 먹어도 봉사는 꾸준히 해야죠. 24시간 쉬지 않고 해야죠. 봉사가 저이고, 제가 할 일이잖아요."그 덕분일까. 김 회장은 동안 여러 기관·단체에서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다. 1999년엔 행정자치부로부터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올 4월 제37회 장애인의 날엔 국민훈장 석류장까지 받았다.
김 회장의 취미는 등산과 여행이다.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지리산 천황봉과 설악산 대청봉, 한라산 백록담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산에 다 올랐다. 소백산 겨울산행도 경험했다. 일본에 있는 후지산까지도 다녀왔다.
"등산을 통해 새로운 목표를 향한 도전과 성취욕을 배워요. 주어진 내 삶을 산의 정상처럼 우뚝 세우겠다는 다짐도 하죠. 어머니 품처럼 편안함과 고요함도 느끼고요. 우리의 일상도 산처럼 자연스러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여행은 일탈이에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을 대하면서 활력을 재충전하는 거죠."김 회장의 등산과 여행 예찬이다. 그 영향인지, 그는 언제라도 밝고 활기에 넘쳐 있다. 얼굴도 해맑은 소년의 모습 그대로다. 눈을 온전히 뜨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데까지 보는 혜안도 지녔다. 비장애인이 눈을 부릅뜨고도 하지 못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하고 있다.
최근엔 사회적 협동조합 '어둠속의 빛'을 만들었다. 장애인은 물론 그늘진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자립을 돕고, 나아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이를 위해 김 회장은 오늘도 '갑질'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도리반도리반 둘러보며 '봉사'할 데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