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선에서 유권자 699만 8342명(21.41%)의 표를 얻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제보조작 사건은 어떤 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대선 후보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저를 지지해준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박주선 비대위원장이 지난달 26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한 지 16일 만의 공식 입장 표명이었다. 안 전 대표는 이날 11분의 짧은 기자회견을 통해 거듭 사과하고 앞으로 자숙하겠다면서도, "실망·분노는 저 안철수에게 쏟아내시고, 힘겹게 만든 다당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국민의당에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라"고 호소했다.
안 전 대표가 "검찰수사를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다"며 준비해 온 회견문에는 그의 자책도 담겨있다. "조작사건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며 말문을 연 안 전 대표는 회견 서두에 "저를 지지해주신 국민께 사과드린다. 또 선거 때 헌신해준 당원·동료 정치인들께, 심적 고통을 느꼈을 당사자에게 사과드린다"며 거듭 사과를 표했다.
회견문을 '대국민 사과'로 시작한 그는 이어 '자성'과 '책임'을 언급했다. "국민의당은 신생 정당으로 체계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것도 모두 제 한계이자 책임", "이번 사건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다. 모든 짐은 제가 짊어지고 가겠다"는 게 안 전 대표의 설명이다.
"검증 부실로 인한 사건은 결국 명예훼손을 넘어 공명선거에 오점을 남겼다"는 등 사안의 심각성을 짚은 부분, 또 본인과 국민의당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반성하겠다. 원점에서, 뿌리까지 제 정치 인생을 돌아보겠다"는 내용에서는 일종의 비장함마저 엿보인다.
안 전 대표의 사과는, 앞서 당 지도부가 "젊은 사회초년생들의 끔찍한 발상(김동철 원내대표)", '이유미 단독범행'이라고 자체조사 6일 만에 최종결과를 발표한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안 전 대표의 사과에 여야 정당들은 입을 모아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면서도 행동으로 보여달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때 늦은 사과이나, 사과 자체는 반기는 취지다.
안 전 대표는 이날 사과회견문·질의응답을 통해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저로서도 충격이었다"라고 말해 조작 개입과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날 기자회견을 지켜본 국민의당 전 선대위 핵심관계자는 관련해 "안 후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면서 "이제는 자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사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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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다 짊어지겠다"는 안철수, 구체적 방법 묻자 "..."[전문] 안철수 전 대표 '제보조작' 사건 사과문[분석] 예상대로 '단독범행' 결론, 국민의당 자체조사 뜯어보니...모호한 방법·재발방지 빠지는 등 한계도... 거취 묻자 "모든 역할 고민하겠다"그러나 안 전 대표가 한 대국민 사과는 한계도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정의당 논평)"는 등 내용이 모호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실제 안 전 대표는 이날 '정치적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란 질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반성·성찰하겠다. 당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 하겠다"라고만 답해, '책임'의 구체적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 회견 내용에는 국민의당의 부실한 검증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고쳐나가야 할지, 향후 재발 방지에 대한 내용도 빠져있다.
안 전 대표는 본인의 거취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정계 은퇴도 고려하는가'란 질문에, 그는 "제가 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겠다"라는 답변만을 내놨다. 모호한 대답에, 기자들은 이후에도 송기석·채이배 의원이 진행한 추가 질의응답에서 '은퇴 가능성을 열어둔 거냐'는 등 질문을 던졌지만 명확한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발표는 모호했지만,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는 등 안 전 대표는 정치를 계속할 의지가 있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양순필 국민의당 수석부대변인은 앞서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안 전 대표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죄하고 책임지는 것일지, 다시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은퇴'를 거론하는 건 굉장히 무책임한 것"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국민의당 선대위 전 디지털소통위원장을 맡았던 이현웅 인천부평구을 지역위원장도 "안 전 대표는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라며 이런 분석에 힘을 실었다. 앞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동반 탈당했던 문병호 전 최고위원도 "안 후보는 국민의당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말하는 등, 안 후보가 정치를 지속하는 것에는 이견이 거의 없는 눈치다.
일부 당 관계자는 "안 후보가 의원직이 있나, 대표직이 있나.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을 게 없다"면서 모호한 방법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오염된 새 정치' 지적에 "국민 열망 잊지 않았다"는 안철수... "당도 자숙해야"앞으로 남은 과제는 안철수 전 대표와 국민의당 둘 모두에게 있다.
안 전 대표가 "당도 혼신의 노력을 할 것"이라고 한 것처럼, 국민의당은 우선 이번 사태로 인한 탈당자 등 사태 여파와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고 2018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른정당은 "국민의당은 안철수 전 후보의 책임 통감과도 궤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추미애 대표에) 정치 공세를 할 게 아니라 자숙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당 대선평가위원회에 속한 신용현 의원도 앞서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지금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태를 어떻게 반전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잘못한 건 잘못한 대로 지적받고 비판을 받는 게 마땅하다"며 "정책 제안과 제3당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 등 의원들이 열심히 해서 (지지를) 만회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제보조작 사건으로 안 전 대표는 정치인으로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는 게 중론이다. 그가 지속해 주창해왔던 '새 정치'가 오염됐다는 지적도 많아, 안 전 대표는 이를 회복해야 할 과제를 껴안게 됐다.
안 전 대표는 관련해 "많은 우려가 있는 걸 안다. 큰 실망을 안겨 드려 죄송하다"며 이를 인정하면서도, "국민의당을 3당 체제의 한 축으로 만들었던 국민의 간절한 열망을 잊지 않고 있다. 구성원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고 재차 지지를 호소했다.
한편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는 안 전 대표 사과 직후 KBS에 출연해 "이준서 전 최고위원의 구속이 확정되니 (안 전 대표가) 해명한 것은 시의적절했다"면서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고 재판에서 꼭 유죄판결이 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막말 파문'을 일으켰던 이언주 같은 당 의원은 관련해 본인 페이스북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며 "안 후보의 탓이라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패배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