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멋있다. 잘 생겼어.""작업 걸지 마시오∼잉. 거기는 내 스타일 아닌께.""그러면, 나는?""거기는 더 아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인디, 대학생 관심 없소. 연상 안 좋아한다고라."증기기관열차 안에서 '선도부' 윤재길(59) 씨와 승객들이 주고받는 농(弄)이다. 금세 주변이 '웃음바다'로 변한다.
윤씨는 증기기관열차 안에서 카트를 밀고 다니며 음료와 추억의 주전부리를 팔고 있다. 옛 학창시절의 교련복을 입고 '선도'라고 새겨진 짙은 노란색의 완장을 차고 있다. 영락 없이 거드름 꽤나 피우는 추억 속의 고등학생 차림이다.
윤씨가 타는 증기기관열차는 추억 속의 열차다. 오래 전 완행열차였던 비둘기호와 무궁화호의 좌석 배치 그대로다. 유리창을 위아래로 열고 닫는 것도 똑같다. 쉬는 날 없이 섬진강 기차마을의 옛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하루 5차례 왕복 운행하고 있다.
"우리 애들은 그거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진짜요? 만약에 먹으면 어쩔라요?"윤씨는 대뜸 아이들 앞에 쭈그려 앉아 쫀드기를 하나씩 내민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연탄불 같은 데에 구워먹으면 더 맛있는 추억 속의 주전부리다.
아이들은 실제 먹어본 경험이 없는지, 쫀드기를 통째 입안에 넣고 이로 끊으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윤씨가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며 하나씩 잡고 위아래로 길게 찢어준다. 그제야 아이들이 입안에 넣고 오물거린다.
"선물이다. 아저씨가 그냥 준다. 맛있게 먹어라. 엄마 말씀도 잘 듣고."
윤씨가 지나는 곳마다 '웃음바다'가 된다. 그가 장난을 걸기도 하고, 승객들이 먼저 농을 걸기도 하며 큰웃음을 쏟아낸다. 그는 증기기관열차 안에서 요즘 아이돌 스타가 부럽지 않은 존재다.
"여기서는 제가 군수보다도 나아요. 유명하고, 인기도 있고요."윤씨가 부러 그린 눈썹을 치켜 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윤씨가 증기기관열차를 탄 건 지난 2008년부터였다. 열차 안에 냉방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탓에 승객들이 '덥다, 더워'를 연발하던 여름이었다. 열차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면 좋겠다는 곡성군 관광과의 제안을 받고서였다.
윤씨는 처음에 계량한복을 입고 아이스크림이 가득 든 큰 가방을 메고 돌아다니며 '아이스깨끼'를 외쳤다. 승객들이 좋아라 하며 재미있어 했다. 일부 승객들이 삶은 계란도 팔면 더 좋겠다고 요구했다. 추억의 기차여행에서 삶은 계란을 빼놓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윤씨는 그때부터 날마다 집에서 계란을 삶았다. 삶은 계란을 맛본 승객들이 사이다가 빠졌다고 핀잔을 줬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는 환상의 조합이라는 것이었다. 윤씨는 처음 지날 때엔 아이스크림을, 기차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올 땐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팔았다.
"시원한 아이스깨끼, 얼음보다도 차가운 아이스깨끼 있어요. 계란과 사이다도 있어요. 시원한 아이스깨기..."
옷차림이 계량한복에서 교련복으로 바뀐 건 당시 곡성군수의 제안이었다. 교련복이 더 잘 어울리고 재밌겠다는 이유였다. 실제 교련복에 대한 승객들의 반응이 더 좋았다.
밀고 다니는 카트는 섬진강 기차마을을 운영하는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사줬다. 덕분에 무거운 보따리를 어깨에 메지 않게 됐다. 윤씨는 카트에 사이다와 맥주, 오징어와 쥐포, 존드기, 뽀빠이 등을 싣고 열차 안을 오간다.
교련복을 직접 입어보고 싶다는 승객들의 욕구에 맞춰 열차 안에 별도의 교련복과 교복도 갖춰놓고 있다.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엔 어린이 승객들한테 사탕 선물도 한 보따리씩 준다.
"재밌어요. 저는 그대로지만, 승객들의 얼굴이 매번 바뀌잖아요. 날마다 새로운 분들을 만나고요. 똑같은 열차를 타지만, 지루할 틈이 없어요. 하루 종일 기차 안팎을 돌아다니지만 피곤한지도 모르겠고요. 건강 챙긴다고 따로 운동할 필요도 없잖아요."
윤씨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경운기에 다쳐서 허리 수술을 받았다. 친구들이 업어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 올 정도였다.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친구들이 고생하잖아요. 너무 미안했어요. 저 스스로 창피하기도 했고요. 초등학교만 다니고 말았습니다."초등학교를 졸업한 윤씨는 농사일을 도우며 살았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뒤에는 다른 삶을 꿈꾸며 서울로 갔다. 서울의 중국음식점에서 배달 일을 했다. 중국집의 주방장으로도 일했다. 나중엔 중국음식점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다시 고향이 그리워졌다. 고향에서 살고 싶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씨는 형이 운영하는 한식당의 주방에서 일을 했다. 2년 남짓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증기기관열차를 탔다.
겨울 어느 날, 기차마을에 내린 눈을 치우려고 평소보다 서둘러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도 당했다. 1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기존의 장애에다 사고 후유증까지 더해져 몸은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수익도 신통하지 않다.
그래도 윤씨는 "열차 안에서 승객들과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하루하루가 재밌고 고맙다"고 했다. 곡성군청과 섬진강 기차마을 내 동물농장에서 일하는 두 아들도 듬직하기만 하다. 그가 오늘도 행복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