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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광화문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 손연정

2002년 월드컵이나 미국산쇠고기반대집회 등 그시절 그곳에 있어줘야만 할 것 같은 2000년 이후 굵직굵직한 행사나 집회, 그때마다 서울 광화문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서는 왠지 성이 안 찼다고나할까.

그러다 이사를 오게 되면서 광화문은 이제 동경의 대상에서 일상이 되었다. 10년 전인가 서울에 관광을 왔을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교보문고에서 청계천으로 가려 하니 빼곡한 빌딩 숲 속에서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서슴없이 우리를 태워 경복궁 앞에서 유턴하고 또 유턴을 해(훗날 알았다. 아!! 경복궁 앞에서 유턴을 했구나) 청계천 앞에 내려줬다. 서울 가면 코 베어 간다더니...

첫 광화문행은 '위안부' 수요시위였다. 지하철을 타고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키스의 날카로운 추억이라고나 할까. 살아생전 지하철이 있는 곳에서 살아보지 못했던 나는 누군가처럼 만 원 두장을 지하철매표기에 욱여넣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할지를 몰라 허둥대긴했다.

수요시위가 끝난 후 무사히 데뷔를 마친 자축의 의미로 연합뉴스 건물 지하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아이들은 그후로 한동안 광화문 가자고 하면 연합뉴스 짜장면부터 들먹였다.

다음은 세월호 1주기였다. 광화문은 아니었고 서울광장이었지만 어차피 우리는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려야했기 때문에 광화문으로 통일한다. 돌이켜보니 그 작은(?) 서울광장을 집회장소로 제한했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는 거의 짜부러지다시피했고 막내는 잃어버릴까봐 아빠 목 위에서 내려오지를 못했다.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가 귀에 남는다. 어떻게 인간이 그래요?

인공눈이라도 만들 것처럼 퍼부어대던 물대포에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민중 총궐기날이었다. 덕수궁 앞에 서서 노동자들의 깃발 퍼레이드가 장관이라며 감탄하던 것도 잠시 집회가 끝나고 광화문 쪽으로 행진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물대포가 뿜어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름날이었으면 무더운 여름날 저녁 시민들에게 물놀이라도 시켜주는 줄 알았을 장관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듯한 절망감에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뭔가가 흘러내렸던 세월호 2주기.

이후로 사는 것이 바빠 책 사러 가는 것 외에는 뜸했더니 광화문은 서운했을까. 우릴 다시 불렀다. 뽑지도 않은 사람이 뽑힌 사람 위에 있었단다.

아이들과 내린 광화문역은 익히 알던 그 광화문역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디서 핍박받고 침묵하다 이곳에 왔는지 감격스럽기도 했다. 몇 번 출구인지도 모를 출구까지 떠밀려 나오는 데 30분이 걸렸다. 겨우 어딘가에 자리를 잡긴 했지만 앞사람 뒷통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큰 아이들은 그 와중에 교보문고에 갔다 와 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100m도 안 되는 길 건너 교보문고에 갔다 온 건 2시간 뒤였다. 그래도 그 자리에 있어서 뿌듯했다.

지하철에서 망나니칼을 득템한 날도 있었다. 막내는 종로대로를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며 뛰어다녔다. 종로대로가 집회에 왔다가 가는 사람, 이제 집회에 오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본 적은 없지만 그 옛날 종로 저잣거리가 이랬을까. 언제 종로거리를 걸어보겠냐며 맘껏 걸었으나 토요일마다 걸어야 할 줄은 이때까지는 몰랐다. 

쫌 한산해졌다. 광화문역이 여유가 생겨 종로3가역에서 내리지 않아도 되었고 축제처럼 노점상들이 많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크리스마스라고 전 가족이 참석했다. 즐기지 않는 크리스마스지만 '크리스마스이브는 가족과 함께'를 광화문에서 실천했다.

2016년 마지막 날이다.  보신각 앞에서 십,구,팔,칠,육,오,사,삼,이,일을 외쳤다. 전부터 아슬아슬하던 L사 인터넷망이 끝내 한해의 마지막 날 고객을 배신했다. 막내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큰 아이들과 연락이 끊겼다. 전화가 먹통이 되었다. 새벽 1시에 한 팀은 교보문고, 한 팀은 kt, 한 팀은 광화문역8번출구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집에가니 3시가 넘었다.

세월호 1000일, 이때부터는 혼참러를 선언했다. 많이 울어야 할 것 같아 체면을 생각해 아이들을 두고 갔다. 세월호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나온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나왔다. 원 없이 울었다.

한달에 한 번 정도 아이들과 참가하는 걸로 절충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시국을 맹숭맹하게 맨정신으로 보낼 수 있는 인내의 시간이 끝났다는 말이다. 술 한잔 하면서 성토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많이 참았다.

좋은 성토자리를 찾아서 종로거리를 헤메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조신한 엄마 모습을 보여주느라 자제했던 목청도 맘껏 내질렀다. 행진이 끝나면 좋은 사람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종로밤거리를 걸으니 아직 청춘인 듯했다. 광화문 주변 상가는 토요일마다 대목을 맞고 있지만 경찰 차벽으로 인해 토요일이면 손님 하나 받을 수 없는 헌법재판소 앞 참한 커피숍도 새로운 단골로 지정했다.

추운 겨울 손가락을 녹일 수 있는 어묵 국물 한 컵도 행복했고 밤 10시가 넘은 시간 기름 왕창 두른 종로빈대떡도 맛있었다. 수염 멋드러지게 기른 사장님께 반해 들어선 작은 선술집도 비록 바지락은 적게 들어 실망스러웠지만 사장님 수염만으로 50점은 그냥 주기로 했다. 차소리 끊긴 삼청동거리를 밤 마실 나온 사람처럼 걷다 예쁜 장갑도 사고 종로거리에서 예쁜 코트도 살 수 있어 집회와 쇼핑을 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매연절감장치가 절실히 보이는 메스꺼운 경찰차가 철수한 광화문거리는 어느 한군데 안 예쁜 곳이 없다. 그중 가장 예쁜 것은 사람들이다. 빨간 표 딱지 하나씩 들고 노란 리본 하나씩 꼽고 만나는 사람들은 정말 예쁘다. 스쳐지나가는 그들의 표정에서 이 시대를 같이 헤쳐 가고 있다는 동지애를 느낄 수 있다.

광장은 그 옛날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화염병이 날라다니던 곳에서 물대포가 폭사하던 곳으로, 다시 은은한 촛불의 향연이 넘실대는 곳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이 촛불의 역사가 끝난 후 광장은 또 어떤 역사를 지켜볼것인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바뀐다. 광화문광장은 언제나 그렇 듯 그곳에 남아 또다시 누군가의 희망을 지켜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광화문#광화문촛불집회#위안부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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