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이재언씨와 소두라도를 방문했다. 여수시 남면에 속한 섬은
동경 127°45′, 북위 34°30′에 위치한다. 서쪽 1km 떨어진 지점에 주도인 대두라도가 있으며 북쪽에 화태도와 대횡간도, 동쪽에 소횡간도, 남쪽에 금오도 등이 있다. 소두라도라 불린 이유는 섬의 형태가 콩처럼 작고 둥글기 때문이다.
<두산백과사전>에 의하면 면적 0.19㎢, 해안선길이 7.5㎞, 최고점은 91m이다. 섬에는 현재 9가구 1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은 금오도가 보이는 남쪽 해안에 취락이 형성되어있고,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주요농산물로는 보리·고구마 등을 재배하며, 멸치·문어·장어·정어리·쥐치 등의 어로와 전복·김·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4월과 10월에 풍어를 비는 제사를 올린다. 경관이 아름다워 인근 해역의 섬들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된다.
둥근 콩처럼 생긴 섬이라 평지가 거의 없는 섬에는 마을 뒷산과 폐교 인근의 경사진 밭에서 밭농사를 짓는다. 맑은 물과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마을에 사는 주민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김정호 이장이 주민들 생활상을 설명해줬다.
"이곳에 사는 게 좋냐고요? 좋은 게 뭐 있겠소. 좋은 거는 공기가 좋지. 주민들은 가두리 양식과 멸치, 낚시배를 하면서 살아요. 여기는 여객선이 다니지 않아 살기 힘들어요. 도선이 다닐 수 있도록 몇 년째 건의해도 감감무소식입니다. 부잔교가 없어 할머니들이 섬에 오르내리는데 힘들어해요. 할머니들은 다리에 힘이 없잖아요""평소에는 양식을 하지만 비수기에는 낚시배를 운영하며 먹고 산다"는 박동주씨 댁에서 주민들의 생활상을 듣고 박씨가 알려주는 대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군대에서 훈련받던 시절에나 보았던 길을 힘들게 올라가니 경사진 곳에 거대한 시멘트 옹벽이 나왔다.
축구하다 공 세게 차면 바다로 빠질 것 같은 학교부지엔 우물만 남았다
폭 10여미터에 길이 20여미터의 학교터다. 1965년 4월 두라국민학교 소두분실로 개교하여 운영되다가, 1982년 3월 두라초등학교 소두분교장으로 승격하였으나 1992년 9월 학생수 부족으로 폐교되었다.
한창 때 40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던 학교.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져 헤엄쳐서 주워야할 것처럼 작은 운동장엔 잡초가 가득했다. 이재언 연구원의 얘기에 의하면 "몇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교실 한 칸과 화장실, 닭장, 교사용 관사가 있었다"는데 다른 건 보이지 않고 오직 수동식 우물펌프만 보인다.
멀리 태평양 바다를 보고 꿈꾸었을 학생들을 생각하며 나발도 쪽으로 가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숲속에서 나무를 지고 온다. 가까이 가니 지게가 아닌 멜빵을 만들어 나무를 운반하고 있었다.
어릴적 멜빵으로 나무를 운반하던 생각이 나 "할아버지 기름이 아닌 나무로 밥해먹고 사세요?"라고 묻자 "예! 할멈하고 바닷가에서 나무 때고 살아요. 오고 싶으면 따라와요"라고 했지만 대두라도 사는 김재연씨가 배를 가지고 오기로 약속이 되어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나발도가 보이는 선창가에는 외딴집과 배 한척만 보인다.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 낚시꾼들이 텐트를 쳐놓은 방파제를 찾아갔다. 부산에서 왔다는 10여명의 낚시꾼들은 고기 잡느라 여념이 없다.
"안 추우세요?""춥죠. 추워도 원체 좋아하는 취미인지라 부산에서 여기까지 왔죠. 따끈한 커피 한 잔 하실래요?"아니요. 나는 돈 준다고 해도 추운 겨울에 낚시질 안 하겠어요"감성돔이 잘 잡힌다는 방파제에는 집채만한 텐트와 작은 텐트가 몇채 있었다. 세찬 겨울바람에 텐트가 날아가지 않을까 염려가 돼 텐트 둘레를 보니 10㎏쯤 되는 돌덩이를 텐트 밑 부분에 촘촘하게 놓았다.
김재연씨의 배를 타고 화태도 월전으로 돌아오는 바다에 황혼이 찾아왔다. 차가운 겨울 바다에도 불구하고 낚시에 열중인 사람들을 보고 이재언씨가 입을 열었다.
"모 대학교수가 그러는데 원래 바둑에 미친 사람과 낚시에 미친 사람들은 막을 방도가 없다고 해요""우리 인생도 황혼이 되어 가는데 추운 겨울에 여객선도 다니지 않는 섬을 찾아다니는 우리는 미치지 않았을까요?""괜찮아요! 우리는 곱게 미쳤으니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