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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쓸 일이 없던 말이 오늘날 흔히 쓰이곤 합니다. 지난날하고 오늘날이 다르니 오늘날 흐름에 맞추어 나타나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흐름에 맞춘다고 해서 꼭 새로운 말이지는 않아요. 숨결이나 넋이 새로울 적에 새로운 말이고, 딱딱하거나 낡은 틀에 사로잡히면 딱딱하거나 낡은 말이에요.

'시도(試圖)'는 "어떤 것을 이루어 보려고 계획하거나 행동함"을 뜻하고, '행동(行動)'은 "몸을 움직여 동작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함"을 뜻해요. 두 한자말은 말뜻이 돌림풀이가 되는데요, "시도하지도 않고 그만두지 마"라든지 "네 말대로 행동할게"처럼 쓰지요. 그런데 이런 말마디는 "하지도 않고 그만두지 마"라든지 "네 말대로 할게"처럼 고쳐쓸 수 있습니다. 아니, 예전에는 '시도'나 '행동'을 앞에 안 붙이고 단출하게 '하다'라고만 썼어요.

'하다'라는 낱말은 쓰임새가 무척 많고 넓어요. 한국말에서 가장 자주 쓰는 낱말이라면 바로 '하다'를 꼽을 만해요. 그렇지만 막상 '하다'가 어떤 뜻인가 하고 한국말사전을 뒤적여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아주 흔하고 대단히 자주 쓰는 낱말이지만 외려 어떤 말마디인가를 거의 안 배우고 안 살피고 안 들여다보는 셈이에요.

한국사람으로서는 한국말 '하다'가 너무 쉽고 흔하기에 굳이 이 '하다'를 알맞거나 올바르거나 참답거나 제대로 쓰는 길을 안 살피거나 못 느낄 수 있어요. 외국사람이 한국말을 처음 배운다고 할 적에는 아마 '하다' 때문에 무척 골머리를 앓겠지요. 한국사람이 영어를 배울 적에는 'do' 때문에 몹시 힘들 테고요.

그나저나 '시도하다·행동하다'라고 해야 새로운 말투일까요? '하다'로 넉넉하되 "해 보다·몸소 하다·몸소 나서다"처럼 새롭게 쓸 수는 없을까요?

어른들은 "하루 종일(終日)"이라고 하면 어떤 말인지 어렵잖이 알아듣습니다. 아이한테는 '종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 내내"라는 말도 한국말을 처음 익히는 아이한테는 안 쉬울 수 있어요. 한국말사전에서 '종일'을 찾아보니 '縱逸'이라는 한자말도 나오는데 '縱逸'이 무엇인지 아는 어른은 거의 없을 테며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도 거의 없어요. '縱逸'은 꼭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 낱말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더 살피니 '온종일'하고 '진(盡)종일'이라는 낱말을 '종일'하고 비슷한말로 실어 놓습니다. '온'이라는 낱말을 보니 '온하루'처럼 새 낱말을 지어서 쓰면 좋겠구나 싶어요. 그리고 '내내'라는 한국말을 살피다가 '-내'라고 하는 말마디를 떠올립니다. '겨우내·가으내'처럼 쓰고, '끝내·마침내'처럼 쓰지요. 그러면 '하루내·아침내·낮내·저녁내·밤내'처럼 쓸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예부터 우리 나름대로 때와 곳에 맞게 새로운 말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밑틀이 있어요. 다만 이 밑틀을 살리는 길을 어느 날부터 잊거나 잃었지 싶어요. "하루 내내 = 하루내"라면 "한 달 내내 = 달내"요, "한 해 내내 = 해내"이며, "사는 동안/온 삶을 사는 내내 = 삶내"라는 얼거리예요. 우리는 새말을 짓는 슬기로운 시인이 되어 아이한테 말을 새롭게 가르치면서 배울 수 있어요.

'소싯적(少時-)'이라는 말을 쓰는 어르신이 있어서 가만히 말씀을 듣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한국말사전을 펼쳐 보았습니다. '소싯적'은 "젊었을 때"를 뜻한답니다. 다시 '소시(少時)'를 찾으니 "젊었을 때"를 뜻한답니다. '소싯적·소시'는 말뜻이 같답니다. 그러나 '소싯적 = 소시 + ㅅ + 적'이에요. 겹말입니다. 그냥 "젊을 적"이나 "젊은 날"이나 '한창때'라고 쓸 만하지 싶어요.

날씨 : 그날그날의 비, 구름, 바람, 기온 따위가 나타나는 기상 상태
기후(氣候) : 1. 기온, 비, 눈, 바람 따위의 대기(大氣) 상태
기상(氣象) : [지리]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 바람, 구름, 비, 눈, 더위, 추위 따위를 이른다. '날씨'로 순화

아이들은 '날씨'를 묻습니다. 열 살 언저리 아이라든지 예닐곱 살 아이 가운데 "오늘 기상은 어떻게 돼요?"나 "오늘 기후는 어떤가요?" 하고 묻는 아이가 있을까요? 설마 없을 테지요. 어린이가 쓰는 일기장에도 '날씨'를 적는 칸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날씨를 알리지 않아요. '기상 예보'를 합니다. 공공기관 이름은 '기상청'이에요. 한자말 '기상'은 '날씨'로 고쳐쓰라고 한국말사전에 나오는데, 이 틈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는지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거나 가르칠 만할는지요.

우리 어른들이 이룬 사회에서는 왜 '날씨청'이라는 공공기관을 세울 수 없을까요? 우리 어른들이 짓는 터전에서는 왜 '날씨 알림'을 하지 못할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나 '환경 파괴'가 크게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나 '파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렷이 헤아리거나 살피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환경 파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적에는 '파괴'라는 낱말이 어떤 뜻인지부터 쉽게 풀어내어 알려주어야 해요.

한국말사전에서 '파괴(破壞)'라는 한자말을 살펴봅니다. "1. 때려 부수거나 깨뜨려 헐어 버림 2. 조직, 질서, 관계 따위를 와해하거나 무너뜨림"을 가리킨다고 해요. 이 말뜻을 살피니 '부수다·깨뜨리다·헐다·무너뜨리다' 같은 한국말이 보입니다. 어쩌면 한자말 '파괴'는 네 가지 한국말을 모두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한자말 '파괴'는 다 다른 네 군데에 다 달리 써야 하는 낱말을 시나브로 밀어내고 함부로 쓰인다고 할 수 있어요.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부수다·깨뜨리다·헐다·무너뜨리다'가 저마다 어떻게 다른 뜻과 결과 느낌으로 다르게 쓰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여기에 '망가뜨리다·깨다·깨부수다·허물다'는 또 어떻게 달리 쓰는 낱말인가를 밝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제대로 모르는 채 아무 말이나 그냥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쓰는 나날은 아닐까요?

보금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다닐 적에 으레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관광'이라고 합니다.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다닐 적에 '나들이'나 '마실'을 다닌다고 말하는 이웃을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늘 스스로 좁게 가두는 셈일 수 있어요. 서울마실이나 제주마실을 다니고, 시골마실이나 도시마실을 하며, 저자마실이나 책마실(책방마실)을 다닌다고 할 만해요.

마실이나 나들이를 다니다가 바깥에서 잘 수 있어요. '집밥'과 맞물려 '바깥밥'을 먹듯이, '집잠'하고 맞물려 '바깥잠'을 누려요. 이때에 '여인숙·여관'이라는 이름인 곳에서 묵을 수 있고, '모텔·호텔'이라는 이름인 데에서 머물 수 있어요. '유스호스텔·게스트하우스'라는 이름인 자리에서 지낼 수 있어요.

이 가운데 '게스트하우스(guesthouse)'라는 이름을 살피면 '게스트 + 하우스'인 얼거리요, '손님 + 집'인 셈입니다. 손님이 깃드는 집이 '게스트하우스'이고, 한자말로 '여행자숙소'라고 해요. 이를 한국말로 새롭게 가리킨다면 '손님집'이 될 텐데,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머문다고 해서 '길손집'이라 해 볼 만하고, 나그네가 머물기에 '나그네집'이라 해 볼 만해요. '길손쉼터'나 '나그네쉼터'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어요. 이밖에 얼마든지 생각을 펼쳐서 재미나거나 사랑스럽거나 고운 새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지역 협동조합'이라는 이름까지 안 쓰더라도 '마을두레'라 할 수 있고, '마을살림'을 가꾼다고 할 수 있어요. 마을에는 '마을가게'가 있으며, '마을지기·마을님·마을이웃·마을일꾼'이 있을 테지요. 요새는 '마을책방'이 부쩍 늘어요. 이 흐름을 돌아본다면 '마을쉼터'나 '마을집' 같은 이름으로 "길손이 하룻밤 묵는 집"을 가리킬 수 있어요.

딱딱한 '어른 사회' 말투를 넘어서기란 어려울 수 있으나 쉬울 수 있습니다. 새로운 넋으로 말결을 살리기란 어려울 수 있으나 쉬울 수 있어요. 촛불 한 자루로 평화롭게 대통령 잘잘못을 나무라면서 끌어내릴 수 있듯이, 우리가 저마다 선 자리에서 사랑스레 짓는 말 한 마디로 새로운 말넋을 지필 수 있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돌아봐요. 우리가 늘 마주하는 모든 것부터 새로운 눈으로 살피며 새로운 이름을 쉽고 상냥하며 곱게 붙여 보아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남 광주에서 나오는 문화잡지 <전라도닷컴>에도 함께 싣습니다.



#숲에서 짓는 글살림#국어사전#한국말#우리말#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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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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