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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바위글씨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사기막골삼거리에서 사기막골로 향하는 길가에 있다. 현재 청담동은 군부대가 위치한 출입금지 구역이다.
청담동 바위글씨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사기막골삼거리에서 사기막골로 향하는 길가에 있다. 현재 청담동은 군부대가 위치한 출입금지 구역이다. ⓒ 이종헌

남으로 인수봉과 백운대, 북으로 상장능선이 골짜기를 감싼 청담동

선인들의 유산기를 통해 청담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물론 강남에 있는 그 청담동은 아니다. 북한산 자락 깊숙이 숨어 아직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금단의 땅, 국립공원 내에 있으면서도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 출입이 어려운 이곳에는 조선 헌종 연간에 독락재 구시경이 세운 청담초당이 있었고, 또 그보다 약 40년 후인 숙종 때 수은 홍석보가 세운 와운루가 있었다.

남으로는 인수봉과 백운대가 우뚝 솟아있고, 북으로는 상장능선이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골짜기를 감싸 안았다. 서쪽으로는 노고산이 창릉천을 끼고 담장처럼 길게 둘러서있는 청담동은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북한산성의 배후로서 지리적인 중요성도 매우 높았다.

조선 숙종 38년(1712), 북한산성 축성이 끝난 직후 홍양영장(洪陽營將) 윤제만(尹濟萬)은 그의 상소문에서, 대서문 밖에 남으로 삼백여 보의 성을 쌓아 남문을 삼고, 달이치(達伊峙)의 약간 낮은 곳에 백여 보의 성을 쌓아 북문으로 삼으면 주위 십여 리의 철옹성을 구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달이치는 오늘날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의 솔고개이다. 위로는 청담동이 있어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땅이 넓고 지세가 평탄하여 북한산성의 취약점들을 보충할 수 있으니, 이곳을 외성으로 삼아 내외가 호응해야만 북한산성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이다.

윤제만의 상소는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북한산성의 배후로서 청담동 일원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제시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많은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청담동이라는 지명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어렵다.  본래 청담동이라 함은 솔고개 아래를 흐르는 창릉천의 상류를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곳은 사기막골, 또는 효자리계곡으로 불릴 뿐이다.

비록 사기막골 입구 한편에 능성구씨 문중에서 새겨놓은 <청담동>이라는 바위글씨가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한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곳을 사기막골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예전에 사기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있어서 그렇다는 설도 있고, 또 절터라는 뜻을 가진 한자말 '사기(寺基)'가 그렇게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기그릇 파편이 많이 발견되고,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절터들을 볼 수 있으니 선뜻 어느 한가지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도성 인근 최고의 명승으로 이름을 떨친 와운루

불염재 김희성의 옛그림 18c 중엽 불염재 김희성이 그린 그림<와운루계창>. 뒤쪽으로 와운루가 보이고 앞에 두 사람이 장마로 불어난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은 겸재 정선과 와운루 주인 홍상한이다. 사진 츌처 : 삼성미술관 리움학술총서 고서화제발해설집(2008)
불염재 김희성의 옛그림18c 중엽 불염재 김희성이 그린 그림<와운루계창>. 뒤쪽으로 와운루가 보이고 앞에 두 사람이 장마로 불어난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은 겸재 정선과 와운루 주인 홍상한이다. 사진 츌처 : 삼성미술관 리움학술총서 고서화제발해설집(2008) ⓒ 이종헌

이곳 청담동에 와운루와 청담초당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기원 어유봉은 그의 <청담동부기>에, 인수봉과 천령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야트막한 동부가 있으며 그곳 물가 흰 바위 위에 와운루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임오년(1702) 연간이니 이후 와운루는 약 150여 년간 삼연 김창흡을 필두로 남양 홍세태, 기원 어유봉, 윤경 정래교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묵객들이 유상곡수하며 음풍농월을 즐긴 도성 인근 최고의 명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구시경의 청담초당은 와운루 하류 약 200미터 지점에 있었으며 헌종 연간(1659)에 건립되어 약 40여 년 간 유지되었다. 독서와 사색을 위한 작은 초당이었으나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방문하여 서산정사라는 현판 글씨를 남긴 이후 일약 유명세를 탔으며 지금도 초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근 석벽에는 우암의 시가 새겨져 있다.    

구시경의 <청담초당기>에, 본래의 지명을 따서 초당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절터가 많아서 사기골이라 불렸을지라도 본래 이곳의 지명이 청담동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유산기 검토 결과 와운루는 대략 1850년을 전후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안타까운 것은 와운루의 퇴장과 함께 청담동이라는 지명마저도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육모정고개에 설치된 팻말 육모정고개, 육모정공원, 육모정지킴터 등 북한산에는 의외로 육모정 관련 지명이 많다.
육모정고개에 설치된 팻말육모정고개, 육모정공원, 육모정지킴터 등 북한산에는 의외로 육모정 관련 지명이 많다. ⓒ 이종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였고 그들이 와운루의 옛 터에 세운 육모정이 한동안 남아 있었기에 지금껏 이곳을 육모정 터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영봉에서 상장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아직도 육모정 고개라는 고개가 있고 버젓이 팻말까지 붙어있으니, 본래의 좋은 이름이 있음에도 굳이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육모정 터는 와운루 터로, 육모정 고개는 와운루 고개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2015년, 한국등산레킹지원센터와 한국리서치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에 한 달에 1번 이상(두 달에 1~2번 포함) 등산이나 트레킹을 즐기는 인구는 전체 성인 남녀(모집단 4040만 명)의 63%에 해당하는 약 2547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 국민에게 있어 등산은 이제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가 되었다. 미국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뮤리엘 러카이저는, 우주는 원자가 아닌 스토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산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등산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임을 생각할 때, 그 본래의 이름을 되찾는 일 또한 분명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해당#이종헌#육모정#와운루#청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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